대전일보 로고

[대일문학] 위기의 습관

2019-10-17기사 편집 2019-10-17 08:07:24     

대전일보 > 오피니언 > 사외칼럼

  • 페이스북
  • 구글 플러스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블로그
  • 네이버밴드
  • 핀터레스트
  • 기사URL 복사

첨부사진1이예훈 소설가
여름내 일본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한일 갈등이 온 나라를 들썩였다. 평소 시사적인 문제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오던 터여서 문제의 핵심을 집기가 쉽지 않았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말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알고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수시로 SNS를 드나들며 관련된 정보들을 보고 들었다. 덕분에 제법 논리적인 정보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유튜버들이 엄청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인 방송 시스템을 갖추고 그만한 자료를 준비해 방송하려면 적잖은 수고가 필요할 것이고, 전문적인 지식도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그리 많은 유튜버가 활동하는 게 가능할까. 이게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는 징조겠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SNS의 바다에서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다고 발표한 제품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 정부의 대응 방식은 괜찮은 건지. 무엇보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그 이면에 얼마나 뿌리 깊은 한일 갈등의 요소가 숨어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전한 지식뿐 아니라 거기에 내재된 의식이나 가치관도 함께 흡수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접속한 매체는 모두 내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SNS에서 공급되는 정보의 편향성은 우리가 그동안 접해왔던 공중파 채널과는 비교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중립적이어야 할 도덕적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방송을 할 뿐이니, 보는 사람도 제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보면 그만인 것이다. 이러한 편향성을 피해 보자는 생각에서 영화 '주전장'을 보았고, 도서관에서 '국화와 칼'을 빌려보기도 했다.

'주전장'은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가 제작한 영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의 수술규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주전장'이 의미 있는 이유는 수출규제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일본 전범 기업의 한국인 강제동원 문제는 종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맥락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주전장'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에게 가지고 있는 왜곡된 시각과 자신들의 침략역사를 직면하지도 교육하지도 않는 일본의 속내를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국화와 칼'은 미국이 일본을 함락시키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인 고유의 문화와 성격을 연구한 기록물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우리 국민의 분노와 저항의식에 충분히 공감했고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간이 의도치 않게 보고 들은 다른 이야기들. 일본은 우리보다 힘이 세. 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망할 거야. 이 정부의 오판을 막아야 해. 같은 말들은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불안과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랜 기간 가슴속에 심어져 온 습관화된 공포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부모세대는 한 세기에 걸친 이 땅의 시련기를 살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공포를 몸으로 체득한 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공포를 답습해 왔다, 또 그 공포를 이용해 국민을 길들였던 정권하에서 반세기를 살았다. 어쩌면 거친 손에 태극기를 들고나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진심으로 이 나라를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절에도 온몸을 내던져 불의와 맞서 싸웠던 선인들이 있어서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다. 아직도 어리석은 위기의 습관을 벗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건 그분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이예훈 소설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