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 소제창작촌 디렉터
이성희 소제창작촌 디렉터
투둑, 두둑. 가을이 익어가니 소제창작촌 마당에도 감이 떨어진다. 이곳 마을만큼이나 오래된 키 큰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소리는 조용한 적막을 가르고, 화들짝 놀라 돌아보게 한다. 지난겨울 서늘하게 추운 겨울 마당에서 올려다본 커다랗고 까만 마른 나무는 마치 죽은 고목 같았다. 신기하게도 때가되니 나뭇가지들에서 연한 잎이 솟아나고 뜨거운 여름엔 짙푸른 초록의 잎들이 마당에 그늘을 드리워줬다. 그리고 어느새 무수히 열린 감 열매들을 철푸덕 바닥에 떨군다. 무엇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생겨난들 세월의 변화를 고스란히 견뎌내고 의연히 서있는 나무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신의 생을 사는 것을 지속한다. 어찌 보면 삶의 이치는 식물들의 세계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창작촌 인근엔 비워져있는 집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마당에 사람 키만큼 높다랗게 잡풀이 자라 대문과 담벼락 틈을 뚫고 여리여리한 풀들이 솟아오르는 집은 영락없이 비워져있는 집이다. 오랜 동안 주인 없던 빈자리를 이름 모를 식물들이 메워간다. 퇴락해가는 집-공간을 식물들이 번식하며 채워가는 것이다.

활기가 식어버린 듯 메마른 골목 풍경 속에서도 봄부터 길가에 놓여있는 화분들에선 화사한 꽃들이 진홍빛으로 피어났다. 스티로폼과 한 귀퉁이가 깨어진 빛바랜 플라스틱 화분, 버려진 욕조에서도 한해살이 식물들은 잘도 자랐고 꽃들은 만개했다. 정원이 없어도 집 앞의 골목은 정원이 되기도 하고 자연이 되기도 한다. 도시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뿌리내리고 사는 도시 사람들과 도시의 식물은 닮아있다. 자연속의 식물처럼 마음껏 자라지는 못하지만 무관심 속에서도 번식하는 식물들,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라내는 이름 없는 풀들조차도 그래서 더욱 정겹고 아름답다.

올봄 동네의 아름드리 아름다운 나무들이 베어져나가며 도로공사가 시작됐듯이, 동네의 나무들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봄 소제동 골목의 개복숭아꽃도, 가을이면 골목길에 후둑후둑 열매를 떨구는 수십 년 감나무들도, 빨간 열매가 터져 나온 석류나무도, 골목 안 이름 모를 꽃나무와 과실수들이 허물어지게 될 집들과 함께 잘려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공간에 자연을 옮겨놓고 싶은 우리의 욕망은 여전하기에 이 나무들을 대신해 초고층의 아파트와 어우러진 인공의 정원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한 것을 미리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아릿하다.

이성희 소제창작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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