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⑦ 금산 진산 성지성당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번지의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입구에서 바라본 진산성당의 단아한 모습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번지의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입구에서 바라본 진산성당의 단아한 모습
대전에서 남쪽으로 대둔산로를 따라가다보면 유등천이 지방천을 끌어안는 금산 복수면 구례리가 나온다. 여기서 지방천을 끼고 난 실학로를 구비구비 달리면 대둔산 자락에 닿는다. 금산의 풍광에 감탄하는 사이 소박하지만 정갈한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번지의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기와를 얹은 한옥성당의 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고 한국 천주교 일반인 최초 순교라는 스토리가 입혀져 의미를 더한다.

◇한국 천주교 역사의 한 장면=진산성당이 자리한 이곳은 해발 878m의 대둔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아늑하며 땅이 넓고 조용하며 또한 청정지역이다. 올해 방영된 드라마 `이몽`의 로케이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백제시대 금산과 진산은 각각의 군으로 고종(32년) 1895년 8도의 지방행정구역을 23부로 개편할 때 공주부에 속했다가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전라북도에 있다가 1914년 진산군은 금산군에 병합됐다. 현재 진산은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대둔산이 충남 금산군, 논산시 벌곡면,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경계를 이룬다. 1787년 조선에 처음 천주교가 수용된 이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윤지충(바오로)가 천주교를 전파한 곳으로 조상제사 문제로 야기된 `진산사건`은 정조(15년) 1791년 신해박해로 윤지충, 권상연은 전주에서 순교하는 등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2014년 8월 로마 교황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윤지충과 권상연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거 시복되어, 초기 한국천주교의 지도자, 진산성지는 천주교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진산성지성당이 신앙의 역사가 축적된 장소와 교회사적인 가치를 주목받고 있다.

◇박해의 배경=조선 후기 남인들은 실학자로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서학(西學)을 수용했다. 서양문물 중에는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판토하의 `칠극(七克)`등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학에 관심을 가진 이는 성호 이익(李瀷)과 그의 제자들로 남인을 중심으로 서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일부는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천주신앙을 받아들인 조선의 천주교도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어 이승훈(李承薰)을 북경으로 파견하고 북경에 주재하던 선교사 그랑몽에게 천주교에 대한 교육과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이승훈은 1784년 귀국하고 1785년 서울에서 조선 최초의 천주교 공동체를 형성했다. 평신도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미사와 강론 등을 가졌으나 조선 천주교도들이 하고 있던 가성직제도가 잘못되었고 조상제사 또한 금지된 사항으로 알려지면서 위기를 맞이한다. 조상제사금지령이 내려지자 정약용 등 수많은 양반 천주교도들이 배교의 길을 걷게 되고 이 와중에도 제사금지령을 지키려는 신도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가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해 이후 진산사건이 일어 조선 천주교 박해역사의 서막이 펼쳐졌다.

◇첫 일반인 순교자=한국 최초의 신부인 당진의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한국 첫 천주교 순교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으로서 최초의 순교자는 모르는 이가 많다. 윤지충은 1759년 진산 장구동에서 아버지 윤경과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해남이고 고산 윤선도의 7세손이다. 1783년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남인이라는 집안의 배경과 더불어 천주교 입교로 인해 벼슬길에 나갈 뜻을 접게 되었다. 고종사촌인 정약전 형제를 통해 보게 된`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으로 천주교를 접하게 되고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으로부터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1790년 조선 교회는 조상제사 금지령이 내려지고 이듬해인 1971년 윤지충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사망한다. 아들로부터 천주에 대한 교육을 받아 신심이 깊었던 권씨는 천주의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고, 유언과 신앙에 따라 사촌 권상연과 함께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치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1791년 11월 13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순교자 권상연은 1751년 아버지 권세학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본관은 안동이고 권근의 후예이다. 윤지충과는 이종사촌 간으로 한 동네에서 자랐고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윤지충이 세례를 받자 자신도 고종사촌인 유항검으로부터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1790년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 친척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진산사건으로 윤지충과 같이 1791년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진산사건의 역사적 의의=조선의 지배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는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서학에 대해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조선의 지배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와 정통사상이었던 유교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충돌로 인해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진산사건은 천주교 박해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정은 천주교도들을 무부무군(無父無君)하는 이들이라 여겨 탄압하게 되고 이후 천주교 전파는 주춤하게 된다. 탄압을 받은 신도들은 저마다 교우촌을 형성하여 숨어 살았지만 조선조정의 천주교 박해는 확대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고 박해가 확대되자 천주교도들은 교우촌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살았던 지방리 일대 가새벌에 이주해온 신도들로 인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가새벌 교우촌은 1800년대 초반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상당수의 신도들이 순교했다. 1885년 이후로 선교사의 방문이 계속되자 진산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교우들이 가새벌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고 1922년 지방리 공소를 건립, 1927년 현 성당을 건립하는 등 90여년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근대 한옥성당 고유한 양식 원형 보존=진산성당은 1927년 박 파르트네(프랑스) 신부에 의해 목조건물로 건축되었고 정면3칸, 측면6 칸의 목구조로 전면에 돌출된 종탑이 있었지만 1983년 종탑을 철거하고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종탑과 부속실을 재축했다. 한식목구조(2고주 5량가) 절충식이며 내부는 열주에 의해 3량식 구조이며 7개 베이를 이루는 장방형 건물로 맞배지붕 형태를 보이고 있다. 초기 성당의 정례성격에 따라 벽제대, 난간, 마루 등 재단부와 지붕구조, 내외부기둥은 원형이다. 진산성당은 본당보다 작아 보이나 건물의 격은 성당과 같으며 초기 한식목구조(절충식)의 고유한 양식 및 의장적 요소가 대부분이 원형을 보존되고 있으며 순교의 역사에 따른 신앙의 중심 장소로 보존가치가 높다. 2017년 문화재청은 천주교 진산성지성당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금산군은 진산초등학교 지방분교 자리에 진산관광홍보체험관을 건립, 진산사건 사료실과 진산관광홍보실로 운영해 한국 역사의 천주교를 재 고증하고 있다.길효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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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한 성당 내부 모습
조촐한 성당 내부 모습
진산성지 성당 앞에 세워진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 기념비
진산성지 성당 앞에 세워진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 기념비
현재 모습
현재 모습
1927년 천주교 진산 성지 성단 모습
1927년 천주교 진산 성지 성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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