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석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정보전산실장·책임기술원
최용석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정보전산실장·책임기술원
어린 시절 재미있게 봤던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미래에 핵무기를 능가하는 초자력 무기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5개의 대륙 대다수가 바다에 가라앉는다는 내용이었다. 만화영화에서 주인공 코난은 발가락으로 창을 던지고, 벽을 타고 달리기를 했다. 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는 아픈 다리를 한 걸음씩 떼는 등 여러 사건을 보여주며 어린 시절 동심을 흔들어 놨다. 재미있게 보던 작품의 후반부에 가면 `해일`이라는 용어가 나오면서 바닷물이 쭉 빠져나갔다가 엄청나게 큰 파도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에는 해일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기에 어른에게 물었고, 그 뜻을 익힌 후에 해일이라는 새로운 어휘를 어린 나이에 알게 됐다. `바다에는 참 신기한 현상이 있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정말 해일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문도 생겼다.

실제 해일의 위력을 알게 된 것은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였다. 해일의 힘으로 3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언론매체의 발달과 인터넷의 힘으로 그 참상은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 사건 자체만으로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를 `해일`이라 보도하지 않고 `쓰나미`로 보도한 사실이었다. 언론인 대부분은 `미래소년 코난`을 보지 않았거나, 봤더라도 `해일`이라는 어휘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해일을 해일이라 부르지 못하고 쓰나미라 불러야 한다는 기자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 쓰나미가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용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기관에서 `이제부터 사과를 애플이라는 전문용어로 사용한다`고 발표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멀쩡하게 사용하던 사과라는 말을 애플로 바꿀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언론이 앞장서서 `애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어떤 전문분야를 깊게 공부하다 보면 해당 분야가 발전한 나라의 용어를 받아들여서 전문용어로 사용할 때도 있다. 급하게 그 지식을 받아들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일반 대중에게 얘기할 때는 그 용어를 풀어서 설명해 줘야 한다. 전문가로서 일반 대중 앞에서 자기 의견을 얘기할 때는 일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널리 사용하는 용어로 말해 줘야 한다. 깊게 공부만 하느라고 널리 사용할 수 있는 용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면, 대중 앞에서 전문분야 얘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전문용어를 사용한다고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라, 그 뜻을 우리말로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말이라는 것이 기본 목적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대중이 모르는 용어를 써가면서 왜 그 용어를 모르냐고 탓하는 행위는 이런 기본 목적을 망각한 것이다.

일본에는 영어를 못하는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 그는 일본어로 쓰여진 책만 가지고도 자신의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분야의 일본인 전문가들이 이미 그런 기반을 조성해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한국어만 가지고 노벨상을 받을 만한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후배들을 위해서 이런 기반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생각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김구 선생님께서 한없이 가지고 싶어하던 문화의 힘. 그 근본은 우리 말글에서 출발한다. 기본 문화바탕에서 대부분의 것들을 시작할 수 있기에 이 부분에도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방탄소년단으로 문화의 힘을 보여줬듯이, 우리나라 과학의 힘을 보여줄 날도 오기를 소망한다.

이제 한글날이 다가오고 있다. 한글날이면 언론들은 우리 말글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다룰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있는 전문용어를 널리 쓰일 수 있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꿔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말글사용의 최전선에 서 있는 언론인들의 태도 또한 매우 중요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파더라고 부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최용석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정보전산실장·책임기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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