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과 소남이란 `시경` 국풍(國風)의 첫 머리에 있는 시 두 편을 가리킨다. 필자가 재미있다고 한 것은 연암이 女爲周南(여위주남)의 한 글자 `위(爲)`를 `하느냐?`로 이해한 때문이다. 이에 연암과 대담한 중국의 학자 곡정 왕민호는 `누구도 말하지 못한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극찬한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위(爲)를 자동사 `하다`(do)가 아니라 타동사 `공부한다`(study)로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요즘은 어떨까. 나는 오늘 일삼아서 논어의 여러 버전을 훑어보았다. 김형찬 교수가 번역한 홍익출판사 판 `논어`, 이기석과 한백우가 공역하고 이가원 선생이 감수했다는 홍신문화사 판 신역(新譯) 『논어』, 그리고 류종목 교수가 번역한 문학과 지성사 판 `논어의 문법적 이해` 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위(爲)`를 `공부하다`로 번역하고 있었다. 과연 당대나 후대를 통틀어 연암의 이해는 독창적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공자는 `주남과 소남을 하지(또는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담벽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라며 아들에게 주남과 소남을 할(또는 공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다`와 `공부하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연암은 설명한다. 공부하려고 한다면(필자 주), `그 정도의 시쯤은 하루 아침에라도 외울 수 있는 것이어서, 아들(백어)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공자가 공부했냐고 묻지 않고 하느냐고 물었으니, 이는 악기를 타고 노래를 불렀느냐는 것 아니겠는가?` 시와 노래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이 흐릿함은 `하다`와 `공부하다`의 차이를 `위(爲)`라는 한 글자에 대한 문법적, 관용적 해석과 이해의 차원에서 음악과 문학, 노래와 시의 장르와 범주, 그리고 그것들 간의 소통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있다. `망양록`은 `공자가 시경을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았다는 그것이 음악학`이라고 적고 있다. `옛날에 노래를 한다는 말은 후세에 책을 읽었다는 일과 같은 것`이다. 공자가 시로 흥하고, 예로 서고, 음악으로 이룬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한 뜻은 `음악의 본질이 시에 의지하고, 음악의 효용이 예에 깃들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는 노래를 즐겨 부른 가객(歌客)이었다. 그런데 (상을 당한 이가 있어) `곡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 어울리다가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하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곤 뒤이어 화답하`였다. 이웃장르의 사람들이 `노래한다`라고 하듯 `시(詩)한다` 혹은 `소설(小說)한다`고 하고 싶다. `쓴다`는 타동사가 아닌 자동사 `하다`의 세계를 `욕망한다.`
류달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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