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광 소설가
김종광 소설가
진정서를 써본 일이 있다. 지인이 갇혀 있기에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부양하는 가장임을 긍휼히 여겨 집행유예로 봐주십사 애걸복걸하는 내용이었다. 반성문보다 더 쓰기 힘든 글이 남을 위해 쓰는 진정서임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첫 문장 때문에 괴로웠다. 진정서를 어떻게 쓰는 건지 대략 알아보았는데, 하나 같이 첫 문장이 `존경하는 판사님`이었다. 정말 존경하는 부모와 스승께도 왠지 쑥스럽고 오해 받을까봐 써보지 못한 말을, 생면부지의 판사에게 써야한단 말인가?

판사가 진정서를 틀림없이 읽어주고, 진정서가 판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고 치자. 누구나 쓰듯 `존경하는 판사님`이라고 시작하면, 판사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첫 문장을 신경도 안 쓸 것이다. `존경하는`을 쓰지 않으면 판사의 감정이 상할지 모른다. 진짜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오독할 수도 있다. 불쾌할 수도 있다. "남들 다 쓰는 `존경하는` 말 한 마디를 안 붙였네, 성의가 없어!"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친애하는`을 쓰거나 `대쪽 같으신` `사랑해 마지않는`, `똑바로 판결해주시리라 믿는`, `법의 수호자이신`,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하늘님 같으신` 등과 같이, 남다르게 써도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다. "뭐야, 판사한테 장난쳐?"

판사는 실제로 존경할 만한 분일 테다. 공부로 따진다면 내가 한없이 우러러봐야한다. 일의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할 때 절로 존경심이 든다. 경제적인 면을 따지면 나 같이 모자란 사람은 공경을 해도 모자란다.

불구하고 `존경하는`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 쓰기 싫었을까. 아무리 지인을 구하고자 하는 글이지만, 아무리 의례적인 표현이라지만,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호칭이 아니었기에, 그런 판에 박힌, 진심이 담기지 않은 관용어를 쓰는 것이 저어됐을 테다.

`존경하는`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발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토론인지, 회의인지, 질의인지, 취조인지, 말싸움인지 잘 모르겠지만, 국회의원의 언변 덕분에 곧잘 놀라고 자주 웃는다. 저렇게 재미난 분들이 계신데, 소설이 읽힐 리가 없다. 도무지 적응 안 되는 말이 `존경하는`이다. 주로 진행자인 위원장이 쓰는 말이다. 질의자가 여당의원이든 야당의원이든 꼭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대체 왜? 혹시 반어법일까? 그렇게 보기엔 칭하는 이나 듣는 이나 너무 자연스러운 얼굴이다. 텔레비전 보는 국민을 세뇌시키려는 것일까? 국회의원님을 부를 때는 앞에 `존경하는`을 붙여야 된다고. 국회의원끼리라도 존경해주자는 것일까? 혹시 진심인 걸까? 여야를 떠나서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성별을 떠나서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준 사이더라도, 국회의원으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동류의식의 표현?

`존경하는 의원님`도 `존경하는 판사님` 못지않게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된 관용어일 테다. 내가 추측한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의도가 담겨있다기보다는 위원장쯤 되어 회의진행을 할 때 으레 쓰는 단순관형어일 테다. 품위 없는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당 의원을 자격이 없다고 매도하는 이들도 위원장이 되면 `존경하는 의원님`을 입에 달게 될 테다.

어쩌면 `존경하는`은 법원과 국회뿐만 아니라, 판사 못지않은, 국회의원 못지않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는 말일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존경하는` 사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존경하는 공화국`일지도.

`존경하는`, 그만 하자. 국회의원을 `존경하는(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하는)` 국민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존경 받으면 안 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한테 칭찬 받아야 할 머슴이니까. 국민의 충복끼리 `존경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진짜 언제쯤 존경하고픈 국회의원을 볼 수 있을까.) 정 무슨 말을 붙이고 싶다면 `존중하는` 어떤가. 사람끼리 존중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못하니 `존중하는`이라는 말이라도 사용하라는 것이다.

김종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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