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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밤과 밤송이

2019-09-19기사 편집 2019-09-19 0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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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서광사 주지 도신

밤을 또 다른 말로 율자(栗子)라고도 한다.

밤이라는 말도 매력 있지만 밤나무의 아들(율자)이라는 표현도 참 매력 있다.

밤은 주로 중부·남부지방에 많이 나며, 8월 말에서 10월 중순경에 완전히 영근다.

밤은 비타민이 풍부하고, 성인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서 건강식품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이런 밤을 감싸고 있는 밤송이는 율방(栗房)이라고도 한다.

사전에서는 '밤알을 싸고 있는 두꺼운 겉껍데기. 가시가 돋쳐 있고 밤이 여물면 네 갈래로 벌어져 밤알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정도의 설명으로는 밤송이의 역할이 제대로 설명된 것이 아니다.

밤송이는 꽃이 피었을 때 암꽃은 총포(꽃대의 끝에서 꽃의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 잎이 변한 것) 속에 있는데, 이후 총포는 바깥에 가시가 빽빽하게 난 편구형의 깍정이로 밤의 크기에 맞춰 완숙한 밤송이로 발달하게 된다.

밤송이는 어린 밤이 성숙한 어른의 밤이 될 때까지 결코 스스로 문을 열지 않는다.

만일 밤송이가 스스로 문을 연다면 어린 밤은 결코 성숙할 수 없을 것이다.

거센 외풍에도, 아침저녁의 기온 차에도, 때론 혼란한 폭우에도, 모질고 거친 환경에도, 민감하고 덤덤하게 반응하며 오로지 밤이 성숙하는 그날을 희망하면서 한 시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또한 밤은 어둡고 답답한 포장 안에서 살을 키우며 고독한 인내를 감수한다.

드디어 밤이 다 익었을 때 밤송이는 더 이상 자신의 역할이 필요 없음을 알고, 네 갈래로 몸을 열어 밤이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하고 그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 밤과 밤송이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희생? 인내?

물론 그렇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을 것 같다.

즉 '나의 완성은 상대의 완성에서 이루어진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완성과 같다.

사랑의 완성은 반쪽끼리 만나 완벽한 하나가 되었을 때 이루는지는 것처럼 나의 완성은 상대의 완성에서 비롯된다.

밤알을 지키는 밤송이가 있었기에 큰 밤이 될 수 있었고, 밤알이 있었기에 밤송이는 큰 밤으로 키울 수 있었다.

지금도 저 하늘에 닿아 있는 에베레스트 산을 보라!

또, 그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염홍길과 같은 많은 정복자들을 보라!

만일 에베레스트 산이 없었다면 그 산을 정복한 자들이 있었겠는가?

만일 정복자들이 없었다면 그 에베레스트의 숭엄(崇嚴)이 드러났겠는가?

다시 말해 에베레스트 산의 숭엄은 정복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며, 정복자들은 에베레스트 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발견자와 체험자가 없다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저 밤과 밤송이도 상대를 위해야 자신이 완성된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들의 삶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사회 뉴스를 접하면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멎을 정도의 사건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참 마음이 아프고 쓰라리다.

이제 우리는 사람 정신을 재정비 해야만 한다.

행복이 완성이라면, 그 완성이 타인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진리가 분명히 맞다 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서둘러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잘 익은 밤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행복을 지키고 싶어 한다.

큰 밤이 되는 것도 우리의 몫이고 행복을 지키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기꺼이 나를 위한 그대가 되고 그대를 위한 내가 되어 이 한 세상 함께 노 저어 가고 싶지 않은가?

함께 노 저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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