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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자의 새로운 첫 걸음

2019-09-18기사 편집 2019-09-18 16: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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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역사] 진중권 지음/ 창비/ 524쪽/ 2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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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느끼는 옆 사람의 온기나 몽롱한 아침을 깨우는 커피의 맛처럼 일상에서 느끼는 감각을 과학이 아닌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감각생리학부터 들뢰즈의 현대미학까지, 이성이 진리의 근원으로 여겨지면서 철학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감각학의 역사를 야심차게 복원한 미학자, 진중권의 신간 '감각의역사'가 출간됐다.

오랜 과거부터 인간은 자신의 살갗에 생생하게 와 닿는 다채로운 감각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득한 고대의 사람들은 생물과 무생물의 구별 없이 세상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느꼈고, 신이 인간의 입에 불어넣어주었다는 숨결을 공기라 믿었다. 이렇게 본 대로 지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참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감각이 곧 지각이자 사유였던 것이다.

인류가 진리의 근원을 이성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감각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그동안 이성중심의 철학사에서 배제된 감각 연구는 주로 과학의 소관이었다.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긴 감각론의 역사는 진리가 아니라 오류라 여겨져 철학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근대의 대표적인 합리론자인 데카르트는 "이성적 존재가 되려면 감각을 불신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책은 감각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과학적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럭스(lx)로 표기될 때 체험으로서 빛은 사라지고, 헤르츠(Hz)로 표기될 때 체험으로서 소리는 사라지는 것처럼.

인공지능, 복합현실, 디지털 예술 등 각종 기술과 매체의 발달로 인한 감각지각의 대변동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 우리 시대의 미학자 진중권은 물질이 스스로 감각하고 사유한다고 생각했던 고대의 물활론부터 중세 아랍의 광학, 감각을 이성 아래 포섭한 근대철학, 그리고 새로운 학문의 원천으로서 인간의 몸과 감각체험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현대미학의 여러 논의를 폭 넓게 아우른다.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의 논의를 풍부한 인용에 특유의 간결한 설명을 덧붙여 상세히 소개한다. 신체의 감각만으로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파악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살아 있는 조각상'을 상상한 콩디야크의 사유실험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이 근대철학자의 사유실험이 오늘날 인공지능 기계가 딥러닝을 통해 하나의 유사인격으로 진화해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나아가 근대의 합리적 주체를 대신할 '신체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메를로퐁티의 신체현상학, 플레스너의 감성학과 슈미츠의 신현상학, 들뢰즈의 미학을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몸과 감각의 체험을 해명하는지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조명한다.

현대에 이르러 감각학으로서 미학의 기획이 등장한 배경에는 생각하는 인간만이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사유가 아니라, 직접 느끼고 체험하며 반응하는 인간에 대한 섬세한 관심이 담겨 있다. '감각의 역사'는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존재하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위한 철학적 입장들을 종합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훌륭한 철학 교양서이자 입문서다. 때로는 간결하고, 때로는 풍부하게 이 모든 과정의 이모저모를 종횡무진 설명하는 저자의 거침없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이 새로운 미학적 기획이 옆 사람의 온기를 느낄 줄 아는 인간, 커피의 맛을 느끼고 향유할 줄 아는 인간의 회복을 구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생한 감각의 역사를 따라가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키워보자.조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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