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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산책] 절망이 찾아왔을 때 듣는 음악

2019-09-17기사 편집 2019-09-17 0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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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이상철 공연기획자(스펙트럼 대표이사)

감당할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진다. 지금 이 난관이 두렵고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생각할수록 절망은 큰 고통으로 심장을 짓누른다. 누적된 스트레스도 느끼지 못할 만큼의 숨도 잘 쉬어지지 못할 슬픔을 만났을 때, 우리는 주저앉는다.

우리에게 절망이 찾아올 때와 같이 위대한 작곡가들에게도 큰 시련과 절망이 찾아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작곡가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음악에 담긴다. 음악이 우리들의 시련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절망하는 마음을 대변하듯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이 우리의 마음을 동병상련하며 위안을 준다. 때로는 클래식 작품 혹은 가요 한 곡이 주위 모든 사람들의 백 마디 말보다 눈물이 나도록 고맙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 역시 인생 최대의 절망의 날이 찾아온다. 1897년 3월 28일, 25세의 나이에 교향곡 제1번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한다. 그는 이미 촉망받으며 급부상 중인 젊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회심의 역작으로 평가받길 기대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교향곡 제1번의 초연은 수많은 혹평을 받는다. 만족스럽지 못한 글라주노프의 지휘와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연주, '애굽의 재앙'에 관한 교향곡과 같다는 악평들….이 모든 요소들은 젊은 음악가를 망가트리고 절망으로 절벽 끝까지 몰아세우기 충분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러져버렸다. 여러 시간 스스로 질문하고 또 회의해본 결과, 나는 작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뿌리 깊은 무감각이 날 점령해 버렸다. 나는 낮 시간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 파괴되어 버린 내 생애를 한탄하면서 보내고 있다."

절망의 나락에 빠진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제1번의 초연 이후부터 3년간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못한다. 격려를 받고자 평소에 존경하던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대문호를 찾아갔지만 오히려 곡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 또한 사랑하는 나탈리아 사티나와 결혼하려 했지만 그녀 부모의 반대에 부딪히며 우울증에 빠진다.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Nikolai Dahl, 1860-1939) 박사에게 최면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자신감 회복을 위한 자기 암시적 요법으로, 니콜라이 달은 그에게 이렇게 읊조린다. "당신은 새로운 협주곡을 씁니다. 그 협주곡은 대성공을 하게 됩니다."라며 몇 개월 동안 최면 치료를 지속한다.

라흐마니노프는 28세가 되던 1900년 가을, 공백을 깨고 그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No.2 in Cminor, Op.18)으로 작곡을 시작한다. 이 곡의 흐름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구도와 흡사하다. 하지만 운명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와 환희를 담은 베토벤의 치밀한 구성력과 표현과 달리,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만의 생애가 투영되어 그만의 표현법으로 절망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환희로'의 작풍(作風)은 일맥상통한다.

첫 악장은 절망과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앞으로 걸어가며 시작한다. 이 도입부는 저음의 베이스 음이 교차하며 울리는 종소리와 흡사하다. 이미 지쳐버린 절망의 나약함이 점점 각성하며 단단한 마음과 강렬한 힘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마치 대양과도 같은 러시아풍의 거대한 선율이 음울하면서도 웅장하게 전개된다. 강한 울림으로 제1악장의 종결부를 마치자, 최면에 빠지는 듯이 몽환적이면서 무의식적인 분위기를 제2악장에서 그려낸다. 이어서 제3악장에 와서는 자신감의 회복을 나타내듯 춤곡 풍의 리듬으로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짧게 나오자마자 피아노의 현란한 연주가 뚫고 등장한다. 환희와 희열의 클라이맥스를 향하며 c단조에서 C장조로 전조 되며 장쾌하게 곡이 마무리된다. 여기서 인생의 작은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음계에서는 제3번째 음이 가장 중요한데 이 3도의 위치에 따라 전체적인 음계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슬픈 색채의 c단조와 밝은 색채의 C장조의 음계는 제3음 '반음' 하나 차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이와 같은 피아노 건반 딱 한 개의 반음 차이가 큰 변화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상철 공연기획자(스펙트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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