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구촌 세계를 리딩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간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특히 양 국은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매우 관심있게 그 향방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지금 두 나라는 서로 관세인상을 통한 무역전쟁에 한창이다. 트럼프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친구라고 불렀던 시진핑을 향에 적(enemy)이라고 부르며 `중국은 필요없다`고 소리치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주력 수출품인 대두 및 자동차에 관세를 부과하자 이에 맞서 트럼프는 중국산 모든 제품에 5%의 추가관세를 붙일 것이라며 압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환구시보는 "중국 발전의 근본동력은 내부에 있으며 중국처럼 큰 나라의 성쇠가 외부의 힘에 좌우되는 않는다"며 큰소리 치고있다. 과연 중국의 호언장담은 사실일까? 중국은 외부세계와의 모든 교류를 끊고서도 홀로 살 수 있을까?

여기 명(明)나라의 해금정책과 그에 따른 역사적 파장을 소개한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는 집권초기 과감한 해외팽창정책을 실시한다. 아랍출신의 환관 정화(鄭和)를 중용해 그로 하여금 대선단을 이끌게해 남아시아 및 인도를 거쳐 멀리 동아프리카까지 대항해를 실시하는 소위 정화의 남해대원정사업을 실시했다. 1405년부터 무려 28년간 7차례에 거쳐 30개 국가를 방문, 교역을 실시하고 명황실과의 외교관계를 맺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명은 갑자기 이 해상사업을 포기한다. 함선들을 모두 불태우고 정화의 원정기록과 지도 그리고 대형선박 설계도를 모두 없애고 만다. 민간상선의 해외로의 입출항 및 국제무역거래를 전면금지한다. 수도마저 난징에서 북경으로 천도한다. 바다를 향한 모든 문을 갑자기 꽁꽁 잠근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이었다. `중국의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니 바다는 필요 없고 모든 것은 중국내에서 구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이후 명은 16세기 말까지 민간에 의한 모든 해상무역을 금지하고 오로지 국가 간 조공무역(朝貢貿易)만을 허락하는 소위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한다. 이후 200년 가까이 해금정책을 고수한다. 명나라가 스스로 바다를 포기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육지로 돌아가자 그 자리에 서양세력이 나타나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및 동중국해상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즉, 16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주역인 포르투갈과 네델란드, 영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들은 중국이 포기한 바다에 들어와 중국산 상품과 아시아 각지의 상품을 교환하는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기게 된다. 중국 스스로가 문을 잠그고 자국민의 해상무역을 금지시킴으로써 무역의 기회를 유럽인들에게 내준 셈이다.

명은 자국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해금정책에 빠져 주변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중국 홀로서도 살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대항해시대의 주역이 되지 못한 것이다. 반면 포르투갈은 유럽 변방의 소국이지만 중국산 상품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1513년부터 중국의 문을 두드린다. 처음엔 무력으로 명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1552년 함대사령관 리오넬 데 소사는 광저우만 일대의 왜구와 밀무역상선들을 토벌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명황실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한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거점으로 대일본 및 동남아시아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그 사이 명당국은 적자뿐인 허울 좋은 조공무역만을 고집해 이러한 경제적 이득의 기회를 외국에 내어준 꼴이 되고 만다. 이후 네덜란드를 비롯해 영국 등이 잇따라 광저우에 내항, 끈질기게 교역을 시도한 결과 명과의 교역의 길이 열리게 되고 그들 역시 많은 이득을 보게된다. 서방보다도 1세기나 먼저 대항해에 나서 세계 각국과의 교류를 시작했지만 이를 이어가지 못하고 스스로 항구를 닫고 세계와의 교류를 단절한 명은 세계사의 주역이 될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작금의 중국의 태도가 400년 전의 명나라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왜일까? 미국 역시 당시의 중국처럼 세계최대의 강대국이다. 그들 역시 오만에 빠져 명나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다. 신윤식 한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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