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달상 작가
류달상 작가
며칠 전 서점에서 책을 세 권 샀다. 세 권 모두 같은 책이었다. 어느 지면에서 `집을 부동산으로 보면 삶이 떠돌이가 된다`는 제하의 인터뷰를 읽고 난 뒤였다. 전에도 인터뷰어인 그 건축가의 책을 읽었고 몇 권을 더 사서 사람들에게 준 적이 있다. 이번에도 한 권은 내가 갖고, 한 권은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우송하고, 나머지 한 권은 내 친구 노영관 작가에게 주었다. 아, 아니다. 갖고 주다니. 다른 유무형의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책은 존재할 뿐이지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건축가도 집과 삶의 `문화`를 말했으리라.

같은 책을 여러 권 살만큼 경제가 풍족하지 않아 갈등이 생긴다. 갈등은 일종의 심리적 부등식이다. `여러 권 사고 싶은 마음`과 `경제` 사이, 부등식의 기표, 꼭지점과 열린 면의 방향은 자주 바뀐다. 쉬프트(shift)는 시간이 갈수록 빨라져, 쉬프트의 속도를 앞질러 그냥 사버리는 게 처방이다. 이 부등식에서 경제는 손실이지만 지적 가치를 흐르게 하는 통로로서의 존재성은 살찐다. 물론, 부등식이 언제나 이런 형태는 아니다. 나는 행위의 문화를 더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화란 무엇인가. 사전의 정의.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가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이 되는 행동 양식.` 나름 훌륭한 정의다. 그러나 관청용어들이 그러하듯 피부에 달라붙질 않는다. 문화학자 게오르그 짐멜의 정의는 더 난해하다. `문화란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쯤에서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싶은 독자께는 잠시 인내하고 짐멜의 정의를 부등식에 대입해 보길 권한다. `영혼이 자신에게 이르는 길`과 `영혼이 타인에게 이르는 길` 사이에 부등식 기호 `<` 과 `>` 중 하나를 선택해 넣어보자.

해외여행과 책과 그림과 음악을 많이 접했다고 문화인인 건 아니다. 어떤 세계들이 영혼으로 길을 낸다는 것은 영혼에 화학적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물에 설탕을 넣었다고 해서 물이 설탕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물에서 설탕물`되기`는 화학적 변화이자 존재 전체의 변화다. 설탕이 물의 영혼으로 들어와서 물은 다른 존재로 `되었다`. 여행과 책과 그림과 음악 등에 대한 문화적 경험이란 그 경험들을 통해 자신이 변하는 것이지 경험을 소유하고 타인에게 현시하는 게 아니다. `영혼이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게다. 이런 문화의 존재론은 관계론으로 발전한다.

집은 부동산이 아니고 삶은 떠돌이가 아니라고 말했던 건축가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을 이어주는 통로이지 자신이 목적은 아니다` 존재와 관계, 자신과 타인을 아우르는 건축가의 말을 읽고 한 영혼에 `통로`가 생겼다. 이 통로에서 자신과 타인의 부등식은 등식으로 바뀐다. 존재와 관계, 자신과 타인 사이의 우열이 사라졌다. `나-그`는 곧장 서점으로 갔다. 류달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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