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고향은 대전이었다. 서포 모친 윤씨 부인은 보기 드문 현 부인이었다. 성균관 유생에 버금하는 학식과 교육열에 있어서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분이었다. 성품이 글을 좋아해서 평생 서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역대의 치란治亂과 명신名臣의 언행 보기를 즐겨 했으나 서예나 시문에는 마음 두지 않았다. 서포의 파란만장한 전 생애를 통해, 언제나 은은한 후광처럼 그의 내면생활을 지배하던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스승으로서의 존경심과 어머니로서의 사모의정이 남달라 그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였다. 어머니를 향한 사친지념思親之念은 그의 의식의 저변을 관통하는 한 줄기 빛과 같아서 드디어는 그의 무의식의 심연에 신비스러운 모성상性像이 형성되었다. 서포가 유배지에서 한양집에 계신 노모를 생각하며 지극한 효심에서 창작하여 모친에게 헌정한 소설이 "구운몽"이다. 서포는 구운몽을 은유적으로 모친 윤씨 부인에게 헌정 했다. 김만중(1637∼1692)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서포 김만중 일가를 돌아보면 화려했던 조선시대의 명문거족 광산김씨의 역사가 보인다. 서포는 조선 중기의 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조선 예학의 종장이며 논산 돈암서원 사계 김장생 선생이 증조부이며, 큰 조부 신독재 김집, 조부 허주 김반, 둘째 아버지 창주 김익희, 형 서석 김만기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기라성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명멸했다.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사계와 신독재 부자가 배향된 사실과 홍문관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다. 서포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정축호란 때 뱃길에서 난리를 피하고 1637년 10월 김만중은 전선 속 배 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남편을 떠나보낸 윤씨 부인은 친정 부모를 모시고 어린 만기와 만중 두 형제를 키워야 했다. 어린 자식들에게 글 가르킬 선생을 모실 형편이 되지 못해 사서삼경을 몸소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좌측엔 미음을 가지고 우측엔 매를 잡았다 가르침으로서 사랑을 삼는 어머니 마음 마냥 괴로워했다고 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서책의 값을 헤아리지 않고 사서 읽혔다. 스승으로서의 엄격함과 어머니로서 자애로움으로 키웠으니 그의 효성 또한 지극할 수밖에 없었다. 서포는 소설 "구운몽"을 통해 자기 집안의 영고성쇠가 숙명임을 나타내어 스스로를 위안하고, 어머니의 안타까운 인생역정을 위로해 드린 것이다. 이런 서포에게 유배지에서 모친의 부음을 전해듣고, 통한의 아품으로 몸부림치다 정신을 차리고 남해 적소에 위패를 모시고 사모의 혈정을 그 정명한 행장으로 지어 바치고 삼년 동안 대전 정명동(현 대전 전민동) 산소를 향해 조석으로 상식을 바쳐 서러워하며 피눈물로 호곡하다 통고 발병하시어 세상을 떠났으니 가히 효행에 목숨을 바친 추천 대효라 하겠다. 사실상 조선조 유학 사상으로 볼 때 서포의 효행사상이 핵심을 이루고 있어 제반 행실과 업적에서는 당시 선비들의 사표가 됨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지성의 정점에서 정치, 예절, 제도, 문화, 사상 등에서 과거의 전통적 맥락과 현실의 합리적인 상황에 따라 대국적인 태도를 취하고 널리 수용하여 유가의 정도를 찾아 통달, 총섭하는 학문적 체계를 확립하였다. 본디 고향이란 말은 단순하게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 하지만 그 한마디 보다 더 큰 것은 조상을 모신 선산과 일가친척이 있는 곳이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 살고 있는 곳이다.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사폐지인 대전 전민동 선영에 조부와 아버지를 모시고 그토록 사모하던 어머니까지 이곳에 모셨다. 서포는 우암의 문인이었으며 대전 회덕 유림 천금록에 김만중 이라는 이름을 올리고 대전 전민동 부친의 묘소를 찾아 돌보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의 행장(김진규 찬)이나 숙종실록(19년2월 신축)에도 나타나 있다. 서포의 출생지가 선상 이어서 고향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서포가 거재 유배지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대전선영에 모시게 했다. 대전 전민동 산소를 향해 시묘 살이 보다 더한 피눈물로 상식을 한 효심이나 당시정황으로 보아 서포의 고향은 대전 이었다.

현재 선생의 유배지인 남해에서 유배문학을 혼합해서 기념사업을 열고 있으나 이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딘가 모르게 소흘 하고 대전에 사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생각 한다. 필자는 감히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총의를 모아 시대에 걸맞은 서포문학 축제를 대전에서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 사업을 통해 서포문학관을 만들어 민선 7기를 맞는 대전시는 문화도시로의 격상을 높이는 문화 컨텐즈로도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 될 것이다. 이 사업을 이룩함에 있어 한국문단과 대전시 그리고 문화관광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우리 문인들은 이 사업에 소명의식을 갖이고 이룩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취호당 최재문 시인·대전유교문화진흥원초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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