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머릿속에 선생의 함자는 희미했습니다. 배움에 천착하지 않았고 학창시절 역사는 암기과목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책 한 귀퉁이 짧게 언급된 `물산장려운동`은 스치듯 읽고 넘기면 그 뿐. 이제와 선생께 송구함을 거둘 길 없습니다.

100년 전 선생이 깃발 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패악스럽기 그지없는 일제강점기와 2019년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황망하나 일본의 망동으로 대한민국 경제가 잠시나마 흔들린 참담함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 조처로 시작된 무역갈등, 우리정부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선언 등으로 양국의 긴장감은 해방 이후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물산장려회`를 조직하며 토산품 애용에 앞장섰던 대전·충청의 지역경제는 어떻습니까. 경제발전을 구가하던 과거를 지나 사람과 기업이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인구 150만마저 무너진 정체된 도시의 무력감이 지역사회 전반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역에서 나고 자라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소인배에게도 지역경제와 미래는 걱정거리여서 몇날 며칠 머리 싸매고 선생을 탐구했습니다. 결론은 `신(新) 물산장려운동`으로 귀결됩니다. 지역기업이 지역의 자원으로 만든 것을 먹고 마시며 생활 깊숙이 지역 상품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세상을 앓던 사람.` 청록파 시인 박남수는 선생을 이렇게 우러렀습니다. 소월은 `자그만 키와 여윈 몸매는/ 달은 쇠끝 같은 지조가 튀어날 듯/ 타듯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고 그리워했습니다.

1883년(고종 20년) 2월 평양에서 태어나 오산학교 교사로 후학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켜 민족경제 자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고당 조만식. 1950년 10월 순국하기까지 `옥 같은 몸에 비단 한 번 감아 본 일 없는` 선생께 정부는 1970년 8월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순국 69주기를 맞은 올해 `신 물산장려운동`으로 승화하고 있는 선생의 높은 뜻과 애국정신이 활력 넘치는 충청 경제,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과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매개체로 거듭나길 앙망합니다. `더 고달픈 어디에서 지금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세상을 앓고 계실` 선생을 추앙하며. 문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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