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람을 성취시키는 데는 기도가 있어야 하며, 기도는 볼록 돋보기와 같아 햇빛을 하나로 모아 목적했던 종이 태우기를 성공하는 것처럼 바람을 성취하게 한다.

그렇다면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궁구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기도는 물질적 측면에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유한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기도이다.

정신적 측면에서도 두 가지 종류의 기도가 있다.

하나는 정성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적 기도(허영)이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기도의 경험이 있을 것이고, 특별히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 종교적 대상에게 기복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바라는 것이 있고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도의 성격을 간접 경험한 것이다.

일출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이나 너울 심한 큰 바다 앞에서 시선을 멀리 던지며 품고 있는 꿈에 날개를 달아 훨훨 날려 보내는 것이나, 밭에 감자를 심으며 어머니의 몫과 동생의 몫까지 헤아리는 그 마음에도 이미 기도보다 더 숙연한 지심(至心)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바람과 갈망이 근본이 되었고, 그것이 간절할수록 그 발달은 진지한 형태로 완성을 향해 온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모든 바람과 갈망이 발전하고 뜻을 이룬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바람과 갈망에는 정도와 분수가 있고, 쵀탁동시(어미 닭이 21일간 알을 품어 주면서 병아리를 키우는데 알 속에서 다 자란 병아리가 부리로 여기를 쪼아달라고 탁(託)하면 어미 닭은 병아리가 쪼아 달라는 껍데기 부분을 정확하게 쪼아서 깨는 것을 쵀라고 한다)가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람의 정도(正道)는 무엇일까?

필자는 앞에서 부유한 기도와 가난한 기도를 말했었다.

부유한 기도는 물질의 헌공(獻供)으로써만 기도를 성취하려는 것을 말하고, 가난한 기도는 물질에 구애됨 없이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쳐 간절함으로써 믿음에 통일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정성의 기도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기도로서 내 이웃이 잘되어야 내가 잘된다는 정신을 근본으로, 정성을 다하면 믿음대로 된다는 신념의 발화를 말한다.

형식적 기도란 영혼 없는 마네킹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 그대로 그것은 허영(虛影)일 뿐 분명코 기도는 아니다.

이제 감천(感天)하는 기도의 정도(正道)가 확연해 지는데, 그것은 가난한 기도와 정성의 기도가 하나의 조화를 형성해 핵심적 성취(成就)를 이루는 것이다.

해방을 상징하는 광복(光復)의 성취도 두 기도의 간절함이 힘을 보태었을 것이다.

정도(正道)는 모든 바람과 갈망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한 마음(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치는 간절함)`을 친하게 하고, `정성의 마음(내 이웃이 잘되어야 내가 된다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 믿음대로 된다는 신념의 발화)`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리하여 삿됨이 없으면 지성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간절한 탁(託)에 하늘이 쵀로 응하여 감응(感應)을 알게 할 것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평안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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