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수교를 맺은 한일관계는 아베정권의 부당한 핵심소재 수출 통제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성장모델로 질주해오던 국내산업의 급소와 약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 최고의 빈국에서 지난해 제조업 세계 5위,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국가가 됐다. 하지만 한일 수교 이후 단 한 해도 대일무역 적자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며, 지난해 240억 8000만 달러의 대일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이 중 90%는 산업의 근간이자 핵심요소인 소재에서 발생했다. 돈 벌어 남 주는 취약한 경제구조의 단면이다.

소재는 최종 제품의 완성과 성능을 좌우한다. 소재의 완성 과정에는 공정·나노·융합·기능부여·생산 등 고도의 첨단 기술이 요구된다. 이는 소재가 장착되는 부품과 제조 과정의 장비기술과 결합돼 가치사슬의 고부가가치 허리 부분을 이룬다. 일본이 핵심소재 수출 통제를 장기간 지속한다면 일정부분 국내 공급과 해외 대체수요처를 통해 해결할 수 있겠지만 상당부분 소재는 최소 3-5년 이상 기술개발 기간을 거쳐야 한다. 실증과 양산, 실제 사용으로 이어지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주력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이는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

정부는 지난 5일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했고, 소재부품특별법을 장비를 포함한 상설적인 지원육성법으로 개정키로 했다. 7년간 7조 8000억 원의 R&D 예산을 예비타당성 조사 없이 증액하기로 했다. 수요 대기업과 중소 소재부품장비 기업, 대학 및 공공연구소의 협력을 강화하고 대체소재 수입원 다변화와 해외소재 기업의 M&A도 지원키로 했다. 우리 산업의 핵심소재 공급 부족과 대외의존 심각성을 인식하고 근본적인 기술혁신과 소재개발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기회에 보다 근본적으로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양적 단기성과 중심의 소규모 프로젝트 경쟁 R&D 생태계를 혁신해야 한다. 대기업은 국내 중소기업과의 협력을 통한 소재 기술혁신의 도전적인 길을 외면하고 손쉬운 일본소재의 수입에 기대어 성장해왔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어떤 소재를 필요로 하는지 수요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위험도가 높은 고부가가치 소재 개발에 뛰어들지 못했다. 때문에 출연연과 공공연구소에서 좋은 소재기술이 개발되더라도 실증과 양산에 이르는 사업화 경로가 원천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다.

대기업은 국내 중소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소재부품 자립화 의지와 변화를 확고하게 보여줘야 한다. 중소기업의 투자 위험은 출연연과 공공연구소의 지원을 통해 줄이고 이에 필요한 인재는 대학이 공급하는 선순환 혁신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선순환 기술혁신에 근간을 둔 구조적 산업혁신에 맞춰야 한다.

현재 정부의 20조 원 R&D 투자는 6만 3000개의 부처별 과제로 쪼개어 경쟁공모로 나눠주고, 인건비 사용 등 항목별로 연구비 사용을 규제하고 있다. 출연연의 경우 기획재정부에서 정규직 정원과 인건비 총액을 통제하고 있다. 지금의 체제라면 정부에서 증액하는 R&D 예산이 몇 만개의 과제로 쪼개어 뿌려질 것이고, 인력 채용과 신규 활용이 어려운 출연연 구조로 인해 투자 효과성은 떨어질 것이다. R&D 예산의 양적 증가 이전에 근본적으로 R&D 투자와 수행 방식을 바꿔야 한다. 또 기존에 축적해온 기술들을 다시 꺼내 수요맞춤형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덕특구는 최근 4차 산업혁명 융합기술혁신 패러다임과 지역균형발전 수요에 맞춰 융합혁신플랫폼으로의 전환과 재창조를 모색하고 있다. 핵심소재 개발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R&D체계를 인공지능 기반으로 전환하고 소재부품 실증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그동안 역량을 축적한 대전·충청권은 이를 단 시간 내에 플랫폼화 할 수 있으며, 국내 신산업 성장동력과 기술혁신의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 산학연 협력을 통한 소재부품장비 자립화 제고와 산업구조 혁신, 효과적 R&D성과를 창출하는 연구혁신 생태계 구축, 물리적 혁신클러스터에서 융합혁신 플랫폼으로의 전환 등은 생존을 넘어 파괴적 혁신과 지속가능한 포용적 성장의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고영주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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