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2004년, 4단계로 허용된 `일본대중문화 개방`, 그때 많은 분들이 분노하고 두려워했다.

한일국교정상화(1965년)를 했다지만, 36년 간 지배당한 억분함과 일본정부의 일관된 뻔뻔한 작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가실 수가 없었다. 스포츠 `한일전`이 벌어지면 너무나도 애국적이지만, `일제`를 사용하는 것은 거리낌이 없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는 이율배반 상태에서, 자존심상 일본 영화(특히 애니메이션)·비디오·만화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 일국의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두려움이 컸다는 얘기다. IMF에 돈 빌린 대가로 다양한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고, 세계화를 부르짖는 터수에 세계적인 일본대중문화를 계속 막을 수도 없었고, `한류`를 팔기 위해서는 `일류`도 살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해적판이 난무했다. 차라리 정상 유통시키고 세금을 뜯어내기로 한 정부의 선택은 당연한 바였지만, 불법으로도 그렇게 잘 팔리는데 합법이 되면 얼마나 잘 팔릴지 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한국 문화시장을 휘어잡던 일본 문화가 있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일본소설은 거리낌 없이 살아남았다. 야스나리와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수상(1968, 1994년)은 일본소설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데 일조했을 테다. 누가 감히 노벨문학상수상자를 두 번이나 배출한 나라의 소설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루끼의 등장은 치명적이었다. `상실의 시대`는 수백만 권이 팔렸다. 출판사들은 다투어 일본작가의 소설을 출판했다. 또 다른 하루끼 대박을 꿈꾸면서. 일본신인문학상에 불과한 `아쿠타가와상`은 세계적인 문학상으로 오해받았고, 그 상 받은 일본작가 치고 한국에서 안 뜨고 안 팔린 이가 없었다. 대중문화에서도 그런 장악이 당연해보였다. `대중문화식민지`가 될까봐 떨었던 것이다.

일본대중문화가 완전 개방된 지 15년째, 걱정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대중문화적으로 다시 식민지가 되었다`고 통분하는 분도 계시지만, 그럭저럭 방어해낸 듯하다. 가장 우려했던 호환·마마보다 무서워했던 `비디오`는 사라져버렸고, 나머지는 `불매운동` 같은 거 안 해도 나라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 것이라면, 국`뽕`이랄까 신토불이 정서랄까, 그게 무엇이든 무슨 내용이든 그냥 무조건 싫은 분도 있었겠지만, 좋아하지 않는 데는 나름 까닭이 있었을 테다. 일본 것은 오래 전부터 자유분방한 이야기를 누구나 마음껏 쓰고 읽고 출판했던 전통 때문인지 몰라도 자질구레한 얘기에 유난하다. 주제와 의미를 중요시하는 한국대중에게는 한심하고 사소했을 테다. 한국인 역시 개인주의로 치닫고는 있지만 대의나 사상에 기반하지 않은 일본의 극도한 개인주의는 낯설기만 했을 테다. 또 일본 것은 더는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는 듯 장면의 잔혹성, 엽기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식 엽기와 잔혹이 매우 부담스러운 한국대중이 많았을 테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좀 안다고 해도 참 맥락 없는 전개로 느껴질 때가 흔하다. 가족과 공동체와 나라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 흘리는 장면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눈물나오게 하는 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대중은 일본 것이 도무지 정서에 맞지 않아 감동하기 어려웠고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어쩌면 한국정서와 조금은 더 가까운 미국대중문화를 향유하기에도 바빠서 일본 것은 애초에 관심 밖이었을 수도 있다. `미국의 대중문화식민지`라고 통분하는 분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참 알 수가 없다. `대중`이란 명색이 붙지 않아서일까, 일본 소설만큼은 꾸준히 많이 팔려왔다. 한국소설을 압도했다. 웬만한 일본소설보다 훌륭하고 재미있고 의미있고 감동있는 한국소설이 수두룩한데 하나같이 안 읽힌다. 한국 대중은 한국소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사랑도 국뽕도 신토불이 정서도 나름의 분별도 발휘해주지 않았다. 최소한의 소비에도 인색했다. 구차하지만 한국 작가들과 한국 소설에도 최소한의 사랑을 나눠달라고 호소 드린다.

김종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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