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가 연일 화제다.

최근 화이트 리스트 국가 배제 등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인한 반일감정이 끓어오르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높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다.

홍범도의 주도로 1920년 5월 28일 대한독립군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가 연합해 대한군북로독군부로 군사 통일을 이루고, 군무도독부의 군영인 허룽 현 봉오동에 병력이 집결되면서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수행했다.

봉오동전투의 전단은 전날 있었던 삼둔자 전투에서 비롯됐다. 30명 규모의 독립군 소부대가 국내 진입작전으로 6월 4일 새벽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강양동으로 진격해 후쿠에가 인솔하는 일제 헌병순찰 소대를 격파하고 귀환했다. 기습공격에 대한 보복조치로서 신비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이들 부대는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살육했는데,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방 요지에 잠복했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다시 격파했다.

6월 6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 도독부 소속의 독립군과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1개 중대를 유인한 후 6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맞아 6월 7일 새벽 안산과 고려령 일대에서 이들에게 기습 공격을 가하여 120여 명을 사살했다.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 오자, 이들을 봉오동 계곡으로 깊숙이 유인해 157명을 사살하고 백여 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봉오동 전투`를 본 다수의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말한다.

"영화가 어떻고 스토리가 어떻고 배우가 어떻고를 떠나서 정말 독립을 위해 싸우고 일본의 무자비한 칼과 총에 쓰러져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 때의 그 모든 백성 한 분 한 분 위대하고 감사 하다고…."

차진영 지방부 당진주재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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