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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유관순'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재조명

2019-08-15기사 편집 2019-08-15 11: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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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사진, 사진은 정정화 선생 회고록 '녹두꽃' 에서 발취

[예산]독립운동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남자만의 전유물도 아니지만 반드시 총칼로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독립운동가 정정화(鄭靖和, 1900.8.3.-1991.11.2)선생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가 고향이면서 수원유수(水原留守)를 지낸 부친 정주영과 이인화 사이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로 1900년 8월에 태어났다.

열한 살이 되던 1910년 동갑나기 김의한과 혼인하면서 세상 물정에 눈을 뜨기 시작한 정 선생은 1914년 매동 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 중동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던 신랑 김의한으로부터 '세계 1차 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고 있는 때에 우리나라도 그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등 국제정세를 알게 되면서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쳐갔다.

그러던 정 선생은 1919년 3·1운동 발발을 기화로 그 이듬해인 1920년 1월 상해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 변신해갔다.

망명한 지 보름 남짓해 정정화 선생은 이미 망명해 있던 시아버지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 잠입해 20일 가량 머물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 뒤 그 해 4월 초 상해로 귀환함으로써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의 길을 걷게 됐다. 서슬이 시퍼렇던 일경의 눈을 피해 무려 여섯 번이나 본국을 드나들며 자금을 나르는 일이 무려 27년이란 세월동안 독립자금 모집 및 연락책을 맡았다.

정 선생은 1921년 친정집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두 번 째 임무를 완수하고 그 이듬해인 1922년 6월 중순 세 번째로 국내잠입 밀명을 받고 상해에서 배편으로 청도를 거쳐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다 일경에 체포됐다. 신의주경찰서에 끌려가 심문을 받는 중에 신분이 탄로나 서울 종로경찰서까지 압송되는 등 잠시 고초가 있었으나 큰 문제없이 곧 풀려났다.

정 선생은 그 후 세 차례나 더 국내를 드나들면서 친정집인 예산 등지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해 꾸준하게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해왔었으나 망명정부의 내부 문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정 선생이 사실상 망명정부의 안주인으로써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면서 안정을 찾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밝힌 정 선생은 독립 후 뒷정리를 말끔하게 마친 후 1946년 상하이를 거쳐 미군수송선을 타고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정정화 선생은 독립유공자로서 1982년 대통령 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고 9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소에서 영면에 들어갔다.박대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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