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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너 소사이어티] "기부하는 만큼 기쁨은 두배"

2019-08-07기사 편집 2019-08-07 18: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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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류정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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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보령에서는 두번째이자 충남 67호로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류정길씨는 언론과 인터뷰를 달가와하지 않았다. 기부와 관련된 그의 이야기가 나눔문화를 널리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취지를 확인하고서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대천1동사무소 사랑방에서 만난 류정길(82)씨는 환하게 웃는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 그대로였다. 고액 기부자라면 흔히 있을 법한 사무실이나 흔한 직함 조차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인 부인 김종희 씨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남을 돕게 됐다고 한다.

처음 기부를 시작한 것은 지난 1998년. 모교인 한산초등학교에 장학금 1억 500만 원을 냈다. 워낙 큰 돈이라 기부 의사를 밝히자 처음에는 부인과 자녀들은 반대했으나 '여유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류씨의 의지에 가족 모두 이해해 주게 됐다. 이제는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까지 해 주고 있다.

이듬해 꽃동네 오응진 신부님과 개신교 두레 대표 김홍진 목사님께 각각 1000만 원을 헌금하고, 2000년 보령시 동대동으로 이사를 오게됐다.

류씨는 고향 서천 한산이 아닌 보령으로 귀향을 선택했다. 보령을 선택한 이유는 '돈을 많이 벌었으면 고향에 가지 말라'는 지인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고 지금은 보령에 둥지를 튼 것이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보령으로 이사 후부터 2016년까지 서천지역 성당과 보령 성당에 헌금을 내고 대천동 노인회관 3곳에 2500만 원을 기부했다. 국내외 어려운 이웃들의 위해 보이지 않는 기부를 계속해 왔다. 2017년 8월 사랑의 열매에 1억 원을 기부하며 아너 소사이어어티 회원이 됐다.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6억 5000만 원이 넘는다.

류씨는 "기부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다. 절로 춤이 나올 정도"라며 "기부가 인생에 즐거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하고 즐거움과 희열 속에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가슴이 뿌듯하고 누구를 만나도 즐겁단다. 류씨는 삶을 90살까지로 계획하고 기부를 계속하겠다고 밝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성공한 삶이지만 류씨에게도 입에 풀칠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류씨는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고 지난 날들을 돌아봤다.

서천군 한산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류씨는 가난 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했다. 가정의 어려운 형편으로 식량이 없어 방앗간에서 겨를 얻어와 끼니를 때우고 산나물로 허기진 배를 달래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류씨에게 지게를 맞춰주며 집안일을 돕도록 했다.

류씨는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싸준 보리쌀 두말을 가지고 서울행 열차표를 구해 무작정 상경했댜, 서울에는 단 한명의 일가친척이나 아는 사람도 없었다. 10대 소년에게 낯선 서울 생활은 험난했다. 처음엔 하루하루 먹고자는 것조차 힘들었다. 때마침 닥쳐온 겨울에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하수도 공사를 위해 파놓은 땅굴 속에 몸을 뉘어야 했다. 막노동과 구두닦기로 번 돈을 깡패들에게 빼앗기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하루종일 지게 짐을 날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에게서 군대에 가면 배 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시험에 떨어질까 걱정 돼 공부하느라 밤을 새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겨우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드디어 끼니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 후에도 가난이란 놈은 좀처럼 떠나가지 않았다. 시청 청소부로 일 하다 아내를 만나게 됐다. 둘이 쉴새 없이 일을 해 돈을 벌었지만 모이지 않았다. 자식을 잘 키울 자신이 없어 자녀도 둘만 낳았다.

"청계천에 근근히 마련한 보금자리조차 청계천 복계 공사라는 재개발로 철거돼 광교(지금의 성남시)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루하루가 힘들기만 하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오더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던가. 부동산업계에 발을 디디면서 류씨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복덕방을 하던 해병대 선임의 권유로 시작한 일인데 마침 부동산 경기가 호황을 맞으며 큰 돈을 벌게 됐다. 직장인 한 달 월급이 20만 원 남짓하던 시절 잘 될 때는 하루 50만 원도 손에 쥐는 날도 있었다. 함께 고생한 아내가 너무 고마워 번 돈으로 모두 금을 사 줬다.

"아내는 지금도 가끔 웃으며 돈은 한푼도 갖다 주지 않고 금만 주었다고 말한다. 결혼 예물도 못해줬고 늘 미안해 금이라도 주며 위로해 주고싶었다." 아내를 말할 때마다 류씨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아내를 위하는 마음은 류씨가 또다른 행운을 안겨줬다. 1997년 IMF금융위기가 찾아오자 금값이 폭등했다. 아내는 모아뒀던 금을 모두 내다 팔았고 더욱 큰 돈이 됐다. 류씨는 이때부터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아내가 권유한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며 기부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돈을 벌고 나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컸다고 류씨는 말했다. "고생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보리쌀을 훔쳐 서울행 열차표를 구하도록 했다. 시부모님이나 남편에게 받았을 구박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인생을 90살까지 설계한 류씨 부부는 생활비만 남겨놓고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고 성당에 헌금하겠다고 밝혔다. 자녀들도 모두 부부의 뜻에 따르고 있다.

류씨는 틈만나면 주민자치센터에서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언제나 환한 모습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밴 류씨는 노래실력도 수준급으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류정길씨는 "나 같이 못난 사람도 베풀며 살아가는데 여유있는 사람이 기부를 한다면 더욱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며 "기부하는 만큼 기쁨으로 돌아오니 여유가 있으면 서로 서로 도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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