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정부의 경제적 도발은,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임은 물론, 이를 핑계로 우리나라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일본의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도발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의 배려 문화는 정평이 나있지만, 정작 일본 정부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들의 전범 피해국인 우리나라에 대한 배려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희구했던 `동양평화`는 현재에도 실현되기 어려운 것 같다. 아베가 이루겠다는 `아름다운 나라`는 그들만의 제국일 뿐이다.

건축에 있어서도 배려의 부재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파트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주거의 대표적 형태가 된 아파트들이 사실은 근본적으로 경제적 목적이 우선되는, 그래서 상당수가 주변 환경이나 근린의식 등의 여타 요인들에 대하여서는 배려가 박약한 건조물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신축이든 재건축이든 아파트 건축에 따라붙는 인접 아파트나 주택과의 일조권이나 조망권 시비, 인위적인 소셜 믹스(social mix)의 부작용으로 인한 임대세대 차별 시비, 농촌지역 `나홀로` 아파트로 인한 자연경관 파괴 등 많은 논란들은 배려가 없는 건축으로서 우리나라의 아파트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천형과도 같은 것 들이다. 더 나아가 미래 세대의 가치관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마저 주는 원인이 될 수 있으니 그 폐해는 심대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한편 현대에 있어서 권위주의 역시 배려 없는 건축의 원인이 되고 있는 부정적 관념이다. 대표적인 예로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들 수 있다. 위치의 선정에서 건축설계 과정에 이르기까지 국민에 대한 배려,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배려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요한 배경이 되는 한강의 경관이나 장애자 등 교통 약자의 접근성에 대한 고려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잘못된 권위주의 건축의 사례로 남아있는 것이 우리의 국회의사당이다.

이러한 대형 건축물들만 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정 규모 이상의 대형 건축물들은 다양한 공적 심의의 대상이 되어 다소나마의 공공성을 보완하기라도 하지만 별다른 규제 장치가 없는 지역의 중소규모 건축물들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듯한 경우가 많다. 경관의 조화, 인접 건물의 조망, 외부 공간의 여유 같은 것을 찾는 것은 사치인 것처럼 느끼게까지 한다. 그렇지만 도시의 공공성은 행정기관의 권한에 의해서만 온전히 확보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배려가 있는 건축은 어떠한 건축일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우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건축`, `세심함의 건축`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건축에 있어서 항상 공급자 대 수요자, 건축물 대 주변부, 소유자 대 사용자, 점유 대 공유 등 상대적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 관계에 대해 대립적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보완적 개념으로 보면, 그 해결의 단초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행태건축, 유니버설 디자인, 셉티드(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같은 것들은 모두 사용자의 행태를 세심하게 고려하는 특화디자인의 개념으로서 이제는 일반화되기 시작했지만 더욱 강조돼야 할 `세심함의 건축`을 이루는 일부이다.

더 나아가 배려를 위한 건축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점이 됐다. 한 예를 들자면, 건축가 반 시게루(坂 茂)는, 2014년 건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된 `행동하는 종이건축`이라는 저서에서 자세하게 소개됐지만, 건설과 해체가 간편하고 저렴한 데다 언제 어디서든 쉽게 조달 가능하며 친환경적인 `종이 건축`으로 이재민들이나 전쟁 피난민들에게 안락하고 아름다운 거주처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이 높이 평가 받은 결과였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종이 성당` 모형이 전시되고 있으니 배려를 위한 건축은 어떤 것인지 직접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이재민 임시보호시설과 비교하면 그 발상이 자못 존경받을 만하다. 실로 아름다운 건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걸맞은 건축이 배려가 있는 건축, 배려를 위한 건축이지 않겠는가?

한동욱(남서울대 교수, (사)충남도시건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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