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여름이지만 가을을 준비하는 대학들은 분주하다. 교과목들을 정리하고 새로 만들어 공모하는 중인데 눈에 띄는 것은 융복합 관련 과목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필자도 `바이오아트의 이해`라는 과목을 직접 개발해 가르친 적이 있다. 수업은 바이오아트란 새로운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사실 그것이 왜 예술인가를 설명하는 현대미술담론을 공부하는 쪽에 초점을 두었다. 예컨대 생명과학과 예술을 결합시킨 바이오아트의 대표작가 에두아르도 카츠의 형광토끼 알바(Alba)를 보자. 카츠는 해파리가 지닌 형광 유전자를 알비노 토끼 즉 붉은 눈을 지닌 흰 토끼에게 주입하여 특정 대역의 빛 아래에서 형광 녹색으로 보이는 새로운 종을 탄생시켰다. 유전과학의 실험을 미술에 끌어들인 이 사건은 커다란 이슈가 되었고 바이오아트를 미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바이오아트의 시초를 따지자면 이미 1936년 미국 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로 기록된다. 사진작가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26년 동안 품종개량하여 재배한 화초를 `참제비고깔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는 생명예술을 선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화초가 예술이 될 수 있었을까? 식물이 미술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시 미술관의 급진적인 전시와 새로운 미술담론의 영향이 컸다. 당시 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한 알프레드 바는 바로 그러한 현대미술담론의 장본인이다. 알프레드 바는 스타이컨의 전시가 열리기 두어 달 전에 `입체파와 추상미술전`을 기획했는데, 그 전시는 남성소변기 즉 일상의 물건도 예술이라는 `레디메이드` 장르를 보여주거나 피카소의 그림처럼 사물의 형태가 분해된 추상미술을 소개하고 같은 제목의 책까지 출판했다. 바가 그 전시와 책을 통해서 대중들을 위해 만든 현대미술지도는 현대미술의 교과서 역할을 했다. 어쩌면 그때 참제비고깔이 예술로 받아들여지고 훗날 유전자변형 토끼가 살아있는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그때부터 이루어져온 미술담론 즉 `삶을 위한 예술`이라는 주장을 통해 정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대전에서 주력하는 과학예술과 아티언스 등 융복합예술에 대한 담론은 충분한가? 예술에 대한 담론 없이는 전시든 수업이든 하나의 새로운 정보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제 예술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 역사와 맥락을 읽어야 하는 시대다. 동시대미술은 담론과 동행한다. 유현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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