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4일 이었다. 꽤나 무더운 늦 여름날 오후였다. 아직도 그 때의 가슴 설레이고 떨렸던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충남대 행정학과에서 `재무행정론` 시간강의를 맡아 첫 강의를 한 날이다.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우황 청심환을 미리 먹고 들어갔는데도 무슨 내용을 강의했는지 모르겠다. 100여 명 학생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강의 후 얼굴이 땀에 범벅이 된 채 앞으로 한 학기를 어떻게 맡아야 할지 걱정을 태산같이 했던 기억만 뚜렷이 남아 있다.

그 후 눈 깜짝할 사이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맡은 지 30년 하고도 4년이 지났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빨리 가서 벌써 정년을 앞두게 됐는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간지도 몰랐다는 사실은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방증이기도 해서 아쉬움은 없다. 고마운 대학해서 좋은 제자들을 만난 행운이 크기 때문에 후회는 더더욱 없다. 단지, 지난 교수로서 살아온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그리고 학계와 제자 및 지역사회에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남은 인생에서 할 일이 남았다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정리해봐야 할 시간은 된 것 같다.

교수활동을 갓 시작한 1980년대 중반의 대한민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과 대학생들과의 충돌은 캠퍼스 내의 일상이었다. 학생 데모가 하루도 끊이질 않았다. 대학 캠퍼스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권 구호와 노래가 늘 귓전에 맴돌았다. 매쾌한 최루탄 가스 냄새가 익숙한 나날이었다. 미국 유학중 배워온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반미감정에 밀려서 강의에 써먹지도 못했다. 오로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종속이론 등 당시 학생들이 열중한 제3세계 이론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신임 교수들에게는 소위 운동권 학생지도라는 의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늘 감시의 눈초리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꼰대 같은 말이지만, 지금 교수들은 상상도 못할 상황이었다.

원래 교수가 내 인생의 목표는 아니었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공부해서 사업가로 성공해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교수가 평생 직업이 되어 이제 정년을 앞두게 되었으니 인생은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더욱이, 행정학을 전공한 것도 고등학교 친구가 대학입시 원서 접수 때 나와 상의 없이 대신 써준 제2지망 학과 때문이다. 친구가 교수로서의 내 전공을 결정해준 셈이다. 이 기막힌 사실도 이제 숙명으로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은 없다. 남이 정해준 전공분야에 혼신을 다해 노력한 결과, 나름 지방자치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권위와 업적을 인정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간 충남대는 고맙게도 나에게 많은 기회와 혜택을 주었다. 충대를 떠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행정학과 교수가 된 후 미국에 다시 돌아갈 기회도 놓치고 혼란스런 사회상 등으로 권태기에 좀 빠진 적이 있다. 그런데 때마침 우리 대학에 자치행정학과가 전국 최초로 설립이 되는 행운이 주어졌다. 1991년 지방자치의 부활을 앞두고 만들어진 값진 결실로서 나는 망설임 없이 자치행정학과로 갔다. 신설학과 학생들과 미래 지방자치와 지역발전의 주역이 된다는 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고 교수와 학생간에 혼연일체가 되어 착실하게 미래를 준비했다. 함께 노력한 결과, 전국 행정고시 수석합격생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전공을 살려 대전과 충남을 비롯해 각계 각층에서 지방자치시대의 주역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충남대 사회과학대 학장 및 행정대학원 원장, 대전발전연구원장, 그리고 대통령소속 지방자치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오면서 지방자치와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지방자치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려면 시민들의 자치의식 함양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 매스컴과 지역언론 활동도 내 일상이 된 바 있다.

특히, 대전일보는 독자들에게 나를 최초로 소개시켜준 고마운 신문이다. 지방자치와 지역의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필자의 견해와 주장을 많이 실어주었다. 비록, 받은 만큼의 사랑과 혜택에 충분히 보답하지 못하고 교정을 떠나지만, 지난 30여 년간 학내·외에서 만난 수많은 제자와 청중 그리고 지역언론과 일반시민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살아갈 예정이다. 고마워요 충남대와 대전일보, 그리고 사랑해 제자들아.

육동일 충남대 자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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