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규  여주대 석좌교수·전 육군대장
박성규 여주대 석좌교수·전 육군대장
평생 군복을 입고 살아왔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을 때마다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로 시작하는 6·25의 노래를 부르면서 적개심을 불태우기도 했고,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이라는 양희은의 노래를 들으며 감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어떠한 경우든 단 한 순간도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무인의 소명을 잊은 적은 없었다. 작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 중에서 유독 안보에 대해만큼은 국민의 입장이 이분법적으로 갈려있다. 한반도 평화추구를 위한 남북대화를 지지하면 낙관론에 빠져 북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안보불감증 환자로 매도되고,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안보염려증에 빠진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정부는 안보를 최상의 가치, 최고의 우선순위라고 주창해왔다. 그런데, 그 안보의 정의 자체가 서로 다르다면 무엇이 진정 나라의 안보를 위한 길이고, 어떤 정책이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가를 규정하기 어렵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천하태평인 한국인들의 모습을 외신들은 기이하다는 시선으로 조명한 바 있다. 이러한 안보불감증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안보염려증으로 인해 남북관계의 개선과 평화정착을 위한 정부의 노력을 폄훼하고 발목을 잡는 것은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것이고 분단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남북 분단현실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마다 국민들이 둘로 갈려 서로를 비난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되는 현상은 개선돼야 한다. 이러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분란을 부추기는 정치집단들의 행태이다. 안보가 보수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존하는 위협을 간과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저당 잡히는 게 진보의 입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안보에 대해서 만큼은 여·야,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국방은 국방부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국방은 국민의 몫이다. 국방의 약화가 초래하는 참상과 비극의 피해자는 바로 국민이고, 안보라는 공공재를 잘 활용하면 국가 번영과 개인의 안전, 행복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국민이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때 어떠한 고난과 수치를 당해야 하는 지를 증언해주는 역사의 자취를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병자호란에서 나라를 지키지 못해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고 인조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치욕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삼전도가 송파에 있고, 국모 시해의 현장에서 일제에 의해 참살당했던 구한말 군인들을 기리는 장충단(奬忠壇)은 이제 공원이 됐다. 또 다시 남의 선의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는 문약한 나라가 돼 우리 아녀자들을 위안부로 내모는 수치와 아픔이 되풀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안보가 소수 국방 커뮤니티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더 이상 정쟁의 도구가 될 수 없도록, 안보불감증이나 안보염려증으로 인한 국론분열이 더 심화되지 않도록 국민이 국방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안보라는 절대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한 쪽으로 기울지 않은 안보관을 정립해야 한다. 우리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위협의 실체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과 태세를 갖춰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현재 정부가 강군 건설 및 자주국방,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남북군사합의 이행 등에 대해 이제는 군복을 벗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국민 각자가 갖고 있는 가치관, 그리고 각자가 속한 정당 및 단체의 성격에 따라 극명하게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벽하게 합치된 견해와 해답을 도출해내는 일은 지난 한 일이 되겠지만,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안보를 위해 나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박성규 여주대 석좌교수·전 육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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