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고 몇 개월을 살았다. 내 주업은 글을 쓰는 것인데 시집을 묶고, 발간하고, 새로 입사한 회사에 적응하느라 진이 빠져서 한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글을 쓰자니 부상 후 필드로 돌아온 선수처럼 영 어색하다.

"쓰긴 썼는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시 창작 수업에서 만난 분들은 대부분 수줍게 자신의 작품을 내보인다. 마치 틀린 답안지를 내미는 학생의 모습이다. 그리고는 묻는다. "선생님도 안 써질 때가 있어요?" "그럼요" "정말요? 선생님은 등단한 시인이잖아요. 선생님이 쓴 글에 자신 없을 때도 있어요?" "네! 매번 그래요" 나의 대답에 수강생들은 놀라면서도 안심하는 눈빛을 보인다.

혹자는 이런 말도 했다. 시 쓰는데 무슨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냐. 한 두 시간 앉아 쓱쓱 쓰면 완성되지 않느냐. 그러나 대부분 작가에게 그 한 두 시간은 몸 푸는 시간이다. 몸이 풀리면 달려야 하고, 달리다보면 신바람이 나서 나의 속도를 주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럼 쓰는 시간은 한 두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훌쩍 넘기게 된다. 한 두 시간에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단어만 끄집어 내 쓴다는 말인데, 거기엔 새로운 문장이 없다.

폴발레리는 산문을 두고 산보하는 것과 같고 시를 두고 춤을 추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속도가 붙어야 나온다는 말이다. 어떤 날엔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과 생각을 지워버리고 알지 못하는 존재가 문장을 불러준다. 나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부르는 것이다. 영혼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영매처럼 시인은 문장이 통과해가는 복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작가는 언제나 촉각을 세운다. 그림도 보러 가고, 여행도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을 자꾸만 제 안으로 불러들인다. 신들린 사람처럼 문장을 찾아 헤맨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시를 쓰는 시간은 자는 동안을 포함해 숨 쉬는 모든 순간이다.

그러나 생활인으로 사는 대다수의 시인들은 세포를 닫고 살아야 한다. 예민해져도 안 되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이질적인 생각들을 꾹꾹 누른다. 정해진 룰과 법칙을 따라 고요하게 존재해야 한다. 시인들이 이런 생활을 감내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시를 지키기 위해서다. 오래 쓰기 위해서는 한 끼의 밥이 있어야 하니까.

정년퇴직 후, 애를 대학에 보낸 후, 쓰고 싶어 찾아오는 분들이 많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 징그러운 문학 병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앓고 있는지 확인한다. 비가 내린 뒤 문을 열었을 때 젖은 나무 냄새를 맡는 사람, 그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반드시 원고지 앞으로 온다. 시 써서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시를 쓰고, 한 번이라도 해독된 사람이라면 시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 죽은 피를 뽑아내듯 한 번씩 내 속에 박힌 긴 문장을 뽑아내야 살 수 있다. 이렇게 시는 시작된다. 어려울 것도 없고, 긴장할 것도 없다. 굳은 근육만 잘 풀어주면 된다. 그 다음엔 살아온 내 이야기를 쓰면 된다. 그저 계속 쓰면 된다. 어디든 똑같다. 잘 하는 사람보다 오래하는 사람이 이긴다.

손미 시인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