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희곡에는 비극과 희극이 있다. 비극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의하면 "비극은 가치 있거나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다.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고, 각종 장식이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서술의 형식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을 취한다. 또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비극은 반동 인물과의 대결에서 주인공이 패배하여 파멸하게 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 연민과 공포를 통해 관객은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쉽게 말한다면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죽음이나 패함의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나는 것이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을 재정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희극은 시작이나 과정이 비극적으로 진행될 수 있지만 결말이 죽음이 아닌 생존, 사랑, 웃음으로 끝맺는 것을 말한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로스(Ross, Robert R.)교수는 색채를 극적인 효과와 극적인 감동을 관련시키기 위해 연구했는데 비극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회색, 파랑, 자주이고 희극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빨강과 주황, 노랑이라고 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은 희극과 비극의 사이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기준으로 8만 6400초, 1440분, 24시간, 이렇게 기나 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지내느냐에 따라 비극적인 하루를 살거나 희극적인 하루를 살 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의 뉴스는 고유정 살인 사건으로 시끄럽고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가져왔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어느 사건과 사고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모방 살인이나 모방 자살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의 기치를 토대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자신을 지켜나간다.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서로 조심한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순간의 찰나를 우리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순간의 생각이 비극과 희극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고유정은 그 순간의 찰나를 잘못 활용하여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다다랐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비극이 되었고 그녀의 주변인들조차도 비극의 현장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선행을 한 두 중학생의 경우는 다르다. 잠실 롯데월드에서 대만 관광객이 잃어버린 지갑 속에는 외화 및 한화 2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거액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운 두 중학생은 30여 분 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가질 것인지 아니면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지 고민하며 주위의 CCTV가 있는지도 파악했다고 한다. 주위에는 CCTV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두 중학생은 순간의 찰나를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하는 선행의 길을 선택했다. 결국 그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고 국위선양은 물론 국민 모두가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희극적인 하루가 되었다. 또한 그들의 가족과 학교 주변인들도 함께 희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극과 희극은 연극에만 있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처신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다. 성경에도 `무릇 지킬 만한 것이 있다면 마음을 다스리라`고 한다. 선을 향한 하루의 시작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우리는 순간의 찰나를 잘 선택해 할 것이다. 우기식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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