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넓히면 그 자체가 한 우주다.

박상륭 선생의 소설 `칠조어론`의 한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마음을 넓힌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결혼 초엽, 열 평짜리 투 룸에서 아내와 함께 살다가, 이 년만에 조금 넓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들을 타향으로 유학 보내고 스물 세평보다 조금 더 넓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둘이 산다. 마음을 넓힌다는 건, 이렇게 사는 공간이 넓어지고, 누군가가 자리를 비운 공지가 내 차지가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주란 무엇인가. 마음이 넓어진 자리가 우주가 된다. 마음과 우주를 연결지은 이 말은 마음과 우주가 모두 부정형(不整形)의 체적을 지니고 있다는 은유도 함축하고 있다. 변한다는 것,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은 위안을 준다. 왜냐하면 나는 형편없이 작고 볼품없고 모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칠조어론`을 읽다가 박상륭 선생의 저 말에 소스라치며, 첫 연인에 반했듯 끌린 것은, 저 말이 그냥 말이 아니라 구원의 빛을 띤 `말씀` 이었기 때문이다.

`진흙 속의 연꽃`과 `옴 마니 밧메훔`이란 주문은 같은 뜻이다. 무명을 걷어 낸 궁극의 자리는 연꽃 보석처럼 빛나지만, 사람이 서 있는 세상은 진흙밭이다. 그러나, 석가 세존 같은 이들은 그러할지 몰라도, 나 자신이 진흙이고 똥거름인데도 존재의 실상을 자기 밖의 세상으로만 밀어내 바라보려는 태도는 자기연민에 그친다. 그러니, 진흙이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성찰에 이르렀다면 기를 쓰고, 마음을 넓히면 그 자체가 한 우주다, 저 말에 매달려야 한다.

박상륭 선생의 소설을 얘기하면 난해함을 들어 소통을 거부하려는 이들이 있다. 사실 선생의 소설은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은유나 상징의 어려움과는 다른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선생의 소설은 기법이나 내용면에서 대단히 합리적인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설픈 박상륭 독자 중의 한사람인 내가 보기에 박상륭 소설을 대하는 자세의 문제는 난해함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선생 스스로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을 쓸 당시에 `메시아콤플렉스`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게 눈 어두운 평자들의 알리바이가 되고 말았다. 선생이 구원자가 되고자하는 욕망에 빠졌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좋은 작가는 `메시아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콤플렉스가 자아라는 욕망의 그물로 향하느냐, 작가와 세상 사람들을 포괄하는 우주적 의미로 확장되느냐는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일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밑천이 필요한가. 밑천이 딸리면 밑천 아래가 보인다. 거기가 진흙이다. 진흙이 밑천이다. 진흙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진흙으로부터 연꽃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먼가. 그러나 마음을 넓히면 그 자체가 한 우주라고 하지 않던가. 마음을 넓히자. 아주 오래인 미래에, 언젠가는, 내가 우주가 될 때까지. 류달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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