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만큼 천재의 출현에 촉각을 세우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노벨상을 기대하고, 국제영화제의 수상에 열광하는 것 이외에도 수능 1등급을 몇 명이나 배출했는지가 명문 고교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대를 한몸에 모으고 반짝이던 우리의 영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과학, 사회, 문화 전반을 통틀어서 유사 이래 세계 최고의 천재는 누구인가? 답은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Issac Newton, 1642-1727) 이다. 그럼 2등은? 이것에 대한 답은 없다. 자신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몇 명 있기는 하다. 그러나 뉴턴이 세계 최고의 천재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뉴턴은 1642년 영국 랭커셔의 작은 마을 울스돕의 소지주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바로 재혼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때문에 평생 그를 따라다닌 정서적 불안정은 모성 결핍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뉴턴의 중학교 시절 성적은 꼴찌나 다름없었는데,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켐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겨우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성적 역시 좋지 않았고, 게다가 재학중이던 1666년에는 런던에 침입한 페스트 때문에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뉴턴은 고향으로 돌아와 본의 아닌 휴가를 보내게 됐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과학에 혁명을 일으킬 거대한 작업이 완성돼 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뉴턴하면 떠올리게 되는 사과나무의 에피소드, 만유인력의 법칙(universal law of gravitation)은 바로 이때 창안됐다. `만유`란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모든 곳에 적용되는 법칙이라는 의미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17세기까지 우주는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뉘어 존재했다. 신의 영역과 인간세상에 적용되는 물리법칙도 당연히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단 하나의 보편법칙 즉, 만유인력만 있으면 충분하게 됐다. 인간이 신의 섭리인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뉴턴의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과와 지식을 연관시키는 서양의 전통에서 사과의 일화가 끊임없이 반복돼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브의 사과부터 미국 애플사의 한 입 먹은 사과 로고까지…. 정원에 앉아 있던 뉴턴 앞에 우연히 사과가 떨어지자, 만유인력이 번쩍하고 눈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훗날 뉴턴이 유명해졌을 때 누군가가 어떻게 이 법칙에 도달했느냐고 묻자 뉴턴은 "내내 이 문제만 생각했으니까" 라고 답했다. 이것은 일상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약간의 시간을 쪼개서 먹는 일과 자는 일에 할애했다. 밥을 먹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서재로 달려가 책상에 앉을 새도 없이 계산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지도교수 배로의 추천으로 뉴턴은 27살에 켐브리지의 수학교수(Lucasian Professor)가 됐다. 이미 학부 시절에 그를 구원한 느슨한 학교체제는 여전히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대학은 무위도식 할 수 있을 만큼 너그러웠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많은 교수들이 켐브리지의 재정을 축냈겠지만, 뉴턴 한 사람을 얻은 것 만으로도 모든 손해를 벌충하고 남지 않았겠는가.

천재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스승의 안목과 교육,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는 후원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을 넘어서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즉, 교육과 후원은 물론 본인의 열정, 이 세 박자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돌연한 천재는 없다. 앞의 두 가지 요소를 최대한 마련한 후, 천재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 국가 사회 구성원의 책임일 것이다. 조정미 대전대 혜화 리버럴아츠 칼리지(H-LAC)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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