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庭園)이라는 용어는 한자문화권에서 생겨나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동산의 뜰`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일본에서 19세기 후반부터 보편화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원림(園林)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 별서(別墅)는 저택에 인접한 경승지나 전원에 은둔하거나 자연을 즐기기 위해 조성된 정원의 일종이다. 대개 본가와 가까이 있어 자체적으로 간단한 취사와 기거를 할 수 있는 소박한 거처, 즉 오늘날 별장을 말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자연과 벗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성정을 함양했다. 별서와 같은 경치좋은 정원에서 계회(契會)와 강학을 여는 등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시했기에 정원경영은 조선선비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세계유산에서 `역사적 정원`을 다루는 플로렌스 헌장(1981)은 정원의 조성목적을 서양의 장식적 정원에 치우쳐 "보여주거나 산책하기 위해 설계 된다". 라고 보고있어 사유와 심신수양 기능이 주가되는 동양정원의 심오한 철학적 가치와는 차별된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송자(宋子)로 불리우고 조선 후기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주자학의 최고봉! 우암 송시열 선생도 우리 고장에 여러 별서를 경영했다.

문헌에 보면 "문정선생은 일찍이 정침 서쪽에 초가로 여러 채를 얽어매고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여러 가지 기국을 심었더라, 그리고 이것을 기국제(杞菊齊)라 하였다. 회덕남쪽에 소제(小堤)가 있는데, 앞에는 큰 연못이 있고, 주위는 수 십리라. 바야흐로 봄물이 생기면 거울 같은 표면이 한없이 넓다. 여름에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그늘을 이루고 가을에는 연꽃이 향기를 품어내더라". 이 설명은 바로 남간정사를 일컫는다. 우암의 정원조성이나 명승유연 기록도 그의 명성 만큼이나 우리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영동의 한천정사, 논산 팔괘정, 명승 제110호로 지정된 노송과 맑은 물, 층암절벽이 빼어난 화양구곡에 암서재를 짓기도 했다. 속리산을 유람하는가 하면 돈암서원을 거점삼아 호남지방을 누볐으며 전국 각지에 많은 바위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바위글씨는 그 곳의 장소적 가치를 부여하는 문인 향유문화의 하나로 멀리 보길도에 송시열의 글씨바위가 남아있다.

또 선생의 철학은 유배생활을 통해 자연과 하나되어 순응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에 그치지 않고 훗날 인간이 자연에 대한 도덕적 책임론으로까지 발전했다.

요즘 우리나라는 미세먼지와 같은 인류의 환경재앙에 앞에 맞서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다. 조선시대 송시열은 그 시대 별서를 경영하며 이미 오늘날 위기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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