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칼럼 북부론 와인에서 설명드렸듯이, 에르미따쥬의 명칭(AOC)은 십자군 참전 기사 스테랭베르그의 은둔(불어 Ermite)에서 유래했습니다. 원래 명칭 Ermitage에 영국 수입상이 영어식으로 `H`를 추가한 Hermitage가 보편적으로 쓰입니다. 에르미따쥬는 19세기에 보르도 와인에 견줄만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여, 한동안 보르도 일등급 샤또 오브리옹과 라피트 로칠드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명성이 에르미따쥬가 속한 마을 이름에까지 영향을 미쳐, 부르곤뉴의 즈브레-샹베르땡이나 사샤뉴-몽라세 마을처럼, 원래 마을 명칭인 땡(Tain)이 땡-에르미따쥬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땡-에르미따쥬 시내에서 북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계단식 경사면 포도밭에 와이너리 이름이 쓰여진 콘크리트 입간판의 대부분은 엠 샤푸띠에(M. Chapoutier)와 폴 자불레 애네(Paul Jaboulet Aine)입니다. 1808년에 출범한 네고시앙을 1922년 인수하여 샤푸띠에로 개명한 마리우스(Marius) 샤푸띠에로부터 1990년 대표로 취임한 미셀(Michel) 샤푸띠에, 그의 자녀 마띨드(Mathilde)와 막심(Maxim)까지 모두 `M`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사용하여 엠(M) 샤푸티에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1834년에 앙뚜완(Antoine) 자불레가 에르미따쥬 포도밭을 구입하면서 시작된 폴 자불레 애네는 앙뚜완의 아들 이름 폴(paul)로 와이너리 이름을 만들어서 170여년 자불레 가문으로 이어 오다가, 2005년말 오메독 3등급 와인 샤또 라라귄(La Lagune)과 샴페인 명가 빌까르 쌀몽(Billecart Salmon)의 프레이 가문에 인수됩니다. 현재는 카롤린(Caroline) 프레이가 본인의 스승인 보르도 와인의 대가 드니 뒤부르디유(Denis Dubourdieu)의 조언하에 유기농법으로 변화를 시도 중입니다.

다른 지역의 AOC와는 달리 에르미따쥬의 토양은 특이하게 여러 지질 시대에 걸쳐 형성되어 다양한 토양을 갖고 있습니다. 화강암 중심의 척박한 토양, 화강암 기반에 오랜 기간 쌓인 퇴적 토양, 알프스 산맥의 빙하를 타고 흘러온 충적 토양, 진흙질에 자갈이 섞인 신생 토양 등 크게 4가지로 구별됩니다. 따라서 소규모 포도밭별로 토양 특성을 띄게 되는데, 폴자블레애네의 아이콘 와인 에르미따쥬 라샤펠(La Chapelle)과 세컨 와인 라쁘띠뜨샤펠(La Petite Chapelle)은 여러 개 밭의 와인을 블렌딩해서 만듭니다. 블렌딩 와인은 보완을 통해 빈티지의 영향을 적게 받고, 밸런스를 갖추기 용이합니다.

엠 샤푸띠에는 블렌딩 와인도 만들지만, 싱글 빈야드 와인에 집중합니다. 엠 샤푸티에의 싱글 빈야드 에르미따쥬 3개 와인 르 빠비용(Le Pavillon), 르 메알(Le Meal), 레르미뜨(L`Ermite)는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아, 꼬뜨로띠를 대표하는 이기갈의 싱글 빈야드 `라라라 시리즈`처럼 에르미따쥬의 `르르르`시리즈로 불리기도 합니다. 싱글 빈야드 에르미따쥬의 라벨 알파벳은 `H`를 빼고 Ermitage로 표기합니다.

일찍이 1991년부터 바이오 다이나믹 농법을 적용한 엠 샤푸띠에의 와인 철학은 떼루아를 인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떼루아의 속성을 잘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나쁜 떼루아(토양)는 거의 없고, 이해되지 않은 떼루아는 많다"라는 표현으로 축약됩니다. `떼루아`를 `사람`으로 바꾸어도 좋은 문구입니다. 자연과 인간을 생각하는 와이너리 엠 샤뿌티에는 시각 장애인들도 와인에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세계 최초로 1996년부터 라벨을 점자로도 표기합니다.

신성식 ETRI 미래전략연구소 산업전략연구그룹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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