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 정경세(1563-1633)는 상주 출신의 유학자이자 관료이다. 1580년 서애 류성룡이 상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18세였던 그는 지역의 유생들과 함께 서애를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이렇게 서애 문하에 입문 한 후 그는 서애의 스승인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접했다. 그는 퇴계로부터 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퇴계의 제자인 서애를 통해 퇴계의 학문에 감화된 후 서애학맥이라는 퇴계학의 우뚝한 줄기를 이뤘다.

우복 정경세가 살았던 때는 남인 영남학파와 서인 기호학파가 정치·학문적으로 치열한 경쟁과 대립을 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퇴계와 서애의 학통과 정치사상을 계승한 남인 영남학파의 기둥인 그 역시 처음에는 충실한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그의 절친한 친구인 오윤겸, 정엽을 통해 기호학파의 거유인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에 대한 생각을 교정하게 됐다. 특히 우복은 당시 율곡의 뒤를 이어 기호학파의 스승으로 존숭 받던 논산의 사계 김장생과 교유했는데, 그들의 교유는 참 지식인, 참 정치인의 소통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당시 관직에 있던 우복이 논산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사계와 나눈 서신을 보면 둘은 서로의 인품에 대한 존경과 상대의 주장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학문과 나랏일을 토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무시간에 몸이 매이다 보니 한번 찾아가 뵙는 것조차 늦어지게 되어 죄송한 마음 간절할 뿐입니다. (중략)그런데도 이에 보잘 것 없는 저에게 까지 물어주셨으니…감히 저의 어리석은 소견을 모두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사계에게 답장",『우복당수간』)

이렇게 서로 존중하며 예를 갖추어 묻고 답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우복이 사계의 제자인 동춘당 송준길을 사위로 맞게 되어 절정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기호학파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학자는 퇴계를 알게 되고 마음으로 사모하게 됐다.

1558년 봄, 혼인한 지 일 년 밖에 안 된 23세의 젊은 청년 율곡 이이는 35세나 연상인 퇴계 이황을 만나러 안동까지 갔다. 퇴계는 율곡을 만난 후 나이를 떠나 더불어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인재로 인정하고 응원했다. 또한 율곡은 현직에 있으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마다 퇴계를 그리워하며 선생이 꼭 필요하니 다시 출사하기를 청했다.

교착된 정국을 풀기 위해 여야 영수회담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다. 영수회담 역시 노론과 소론의 영수가 정국타개를 위해 만나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니 오래 전부터 우리가 해왔던 소통의 방식이다. 치열한 자기논리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지 않던 선비들의 세계에서도 사계와 우복의 교유, 율곡과 퇴계의 만남과 같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찾기 위해 소통하고 협력했던 일을 본받을 일이다.

나와 내 주위에 함몰되지 않고 나보다 훌륭하거나 나와 다른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는 열린 사회를 기대하며 필자의 졸시 `선물같은 만남` 한 편을 남긴다.

`같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어도/ 한 일터에서 일하지 않았어도/ 한 조상에서 갈리지 않았어도/ 만나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웅녀가 환웅을 바라듯/ 율곡이 퇴계를 찾듯이/ 만나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시와 글을 읽고/ 주장과 강연을 듣고/ 주변에 머무는 사람의 향취를 맡고/ 바람에 떠도는 삶의 모습을 들으며// 공부가 존경스럽고/ 인품이 존경스럽고/ 천진함이 존경스럽고/ 자신감이 존경스럽고/ 무모함이 존경스럽고/ 따뜻함이 존경스러우면// 한 하늘 아래 귀한 인연 다하기 전에/ 부지런히 찾아가 만날 일이다// 마음에 흐르는 보고픔 감추지 못해/ 눈에 그렁그렁 그리움 매단 채// 두 손 빈 채로 나를/ 선물처럼 내맡겨/ 다가갈 일이다` ("선물같은 만남", 정재근 시집,『새 집을 지으면』에서)

정재근 유엔거버넌스센터원장·시인·전 행정자치부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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