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통일" 작별 인사 민주화 동반자 떠나다

2019-06-11기사 편집 2019-06-11 17: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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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가시밭길 여정 '동행' 故 이희호 여사

첨부사진1[사진=연합뉴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10일 별세한 고(故) 이희호 여사의 유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지로서 47년을 함께하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면서도, 스스로 주체적 민주화 운동가의 삶을 평생 살아온 이 여사는 마지막까지도 한반도와 국민에 대한 걱정과 애정을 보였다.

이 여사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캐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여성이었다.

1962년 대한 YWCA 총무로 활동하다가 김 전 대통령과 혼인했는데, 결혼한 지 불과 10일 만에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면서 파란만장한 결혼사가 시작됐다.

1963년 6대 총선에서 '최대 격전지'인 목포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된 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의 선봉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의 정치역정은 이 여사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거 때마다 '남편이 1진이라면 나는 2진'이라며 김 전 대통령이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정책제안의 바탕이 되는 신문 스크랩도 이 여사가 전담했다는 전언이다.

이 여사는 꼼꼼한 내조에 더해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김 전 대통령을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우뚝 서게 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사흘 만에 풀려난 뒤 다른 구속자 가족들과 양심수 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석방 운동에 앞장섰다. 김 전 대통령의 첫 재판 때 검정 테이프를 입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하던 사진은 고된 옥바라지 속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모습으로 유명하다.

1978년 석방된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반복된 가택 연금으로 '동교동 교도소'라고 불리던 자택에 발이 묶였다가 1980년 5월 17일 또다시 연행됐다. 신군부의 5·18 광주 학살과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남편이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던 무렵, 이 여사는 지독한 관절염과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옥중 남편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도우면서도 청와대 안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했다.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한 뒤 2년 만에 귀국한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장기 연금과 도·감청에 시달리다가 1987년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6·29 선언이후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됐다. 이어진 1987년과 1992년의 대선 패배,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1997년 대선에서 이겨 마침내 국민의정부를 출범시킬 때까지 고비고비마다 이 여사의 숨은 공이 절대적이었다는 게 측근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이 여사는 또 주체적으로 여성운동가이자 사회활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퍼스트 레이디로서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명예총재를 맡아 결식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도왔으며, 한국여성재단을 출범시키고, 여성부를 창설하는데도 직간접적인 역할을 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전 대통령 서거이후에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아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서울=송충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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