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의 미술에 대한 오래된 생각들은 의미 없는 자연의 모방, 의식을 가진 인간이 행하는 의미 있는 모방, 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라는 흐름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이후 무려 1000년이 넘도록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로마 제국의 멸망 후 유럽은 미술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가 없는 시기에 접어들었고, 디드로(Denis Didrot, 1713-1784)가 적극적으로 미술에 대해 언급하기까지 기나긴 침묵의 시대를 거친다.

디드로는 진보적인 계몽주의자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를 표현한 미술작품들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기를 멈추고 보편적으로 제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술이 단순히 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풍속을 순화하며, 덕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당대의 유명했던 두 화가를 비교하며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데, 그 화가는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와 샤르댕(Jean Baptiste Simeon Chardin, 1699-1779)이다.

부셰는 주로 신화에 나오는 여성들을 관능적으로 묘사했다. 디드로는 이러한 그림들에 대해 욕망을 부추기고 악을 쾌적한 것으로 만들어 관객들을 도덕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이 그려질 수밖에 없는 환경·신화적 장면에 의지해 미술을 교육하는 아카데미와 미술학교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화가들은 신화에 뛰어든다. 그들은 삶의 자연스러운 사건에 취미를 잃고, 정숙하지 못하고 광적이며 괴상하고 이상화된 장면들에서 붓을 떼지 못한다. 주피터의 외설적인 모험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말하며, 화가가 사물의 진실을 표현하길 원한다면 누드모델들을 버리고 아틀리에에서 나와 사람들의 진짜 삶을 만나러 가야한다고 말했다.

샤르댕은 자신의 주방을 그린 정물화가 유명한데, 그 정물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식기와 저녁거리 등이다. 실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샤르댕의 정물화는 당대 인물들의 삶과 사회상을 보여주고, 미술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관찰한다는 점에서 디드로가 주장한 미술의 역할에 딱 어울리는 미술가였다. 디드로는 샤르댕을 통해 예술가가 기계적인 모방자가 아니라 실재의 요소들을 명상하는 자이며, 거기에서 의미, 심지어 본질을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때때로 자연은 고갈될 수 있지만 예술은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디드로는 플로티노스의 미술에 대한 생각을 넘어, `본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미술을 바라봤다.

이주형 한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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