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증발사회

2019-05-22기사 편집 2019-05-22 08: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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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100도가 되면 끓는다. 계속 열을 가하면 눈 앞의 물도 수증기로 증발해 사라진다. 증발하는 것이 비단 물 뿐일까.

정규직을 꿈 꿨던 충남 공주의 34세 무기계약직 집배원 청년이 지난 13일 증발했다. 전날 밤 피곤하다며 방으로 자러 들어간 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숨진 아들을 발견했다. 부검 결과 소견은 돌연사. 4월에는 천안의 50대 집배원이 출근 도중 심장마비로 증발했다. 전국집배노동조합에 따르면 지난해만 전국의 집배원 25명이 증발했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의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는 지난해 12월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증발했다. 고용노동부 집계 결과 지난해 산업현장에서 노동자 796명이 산재로 증발했다.

어린이날인 지난 5일 경기도 시흥에서는 빚에 시달리던 부모와 함께 2세, 4세 아이 둘이 증발했다. 2016년 5월 17일 새벽에는 서울특별시 서초동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생면부지의 남성 칼에 찔려 증발했다.

사회적 증발에는 원인이 있다. 앞서 사례들은 감당키 어려운 격무, 이윤 극대화만 골몰하는 산업생태계, 취약한 사회적 안전망, 뿌리 깊은 혐오 등이 증발 요인으로 지목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편의와 안정이 누군가의 증발을 촉진하거나 증발사회를 공고화 할 수도 있다.

같은 태양 아래 살아도 증발은 공평치 않다. '증발사회'에서 특정 계층, 특정 직업군은 증발이 반복되는 일상 풍경이지만 정반대 무리도 엄존한다. 증발될 사람들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해 증발과 무관한 사람들로만 사회가 채워지면 행복할까?

수증기로 증발한 물은 대기로 올라가 구름으로 뭉치고 비로 내려 다시 물로 순환한다. 그러나 주체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증발해버리면 되돌릴 수 없다. 추모로, 기억으로 과거를 소환할 순 있어도 생환은 불가능하다. 갈수록 임계점을 향해 끓어 오르는 증발사회의 온도를 오늘 낮추지 않으면 재앙으로 귀결 될 증발의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윤평호 천안아산취재본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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