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 필자가 공부하던 미국 미시간대학의 한 교수는 그가 개발한 갈등해결 모델로 유명했다. 그는 수년간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서 최고지도자들의 특별정책자문관으로 일을 하면서 그의 모델을 적용하여 부처 간 이견으로 추진이 어려운 여러 정책들을 해결하였다. 당시 도시계획 추진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해결을 위해 시민참여에 대해 공부하고 있던 우리는 그의 복귀 특별강연에 모여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복잡한 모델을 설명하는 대신 정보의 소통을 강조하였다. 이해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주장과 관련정보를 잘 알 수 있게만 하면 굳이 그의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프리카에서 그가 한 일은 정책담당자들이 서로의 주장과 정책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모여서 토론하게 한 것이 전부였다면서 얽히고 얽혀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대부분의 갈등이 정확한 정보의 교환과 이해만으로도 해결되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정확한 정보의 교환과 이해, 정말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고 누구나 알고 있는 이것이 왜 잘 되지 않는가? 필자의 경험을 통해 세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만남을 통한 소통이다. 정확한 정보의 교환과 이해를 위해서는 서로 만나서 소통해야 한다. 언론이나 SNS를 통한 일방적 정보제공은 나와 이미 입장이 같은 사람들의 지원을 더욱 강고하게 할 수는 있지만 입장이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만나야 한다. 협상은 만나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대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둘째,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만 하지 않으면 쉽게 만날 기회를 만들 수 있고 또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협상은 실무선에서 먼저 이루어진다. 여러 차례의 실무협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차 상대방의 입장과 요구를 헤아리는 정보의 교환과 이해과정을 갖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실무자는 협상의 결과를 자기 상사에게 보고할 때 상대방을 헐뜯지 말아야 한다.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한 미안함에 상대방이 못된 사람인 것처럼, 또 그 쪽 제안이 너무도 형편없어서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는 식으로 보고하면 상사에게 상대방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게 해서 다음 번 고위급 협상을 어렵게 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한다는 원칙만 잘 지키면 협상은 성공할 수 있다.

셋째, 입장과 명분으로 대화하지 말고 대안과 실리로 대화하는 것이다. 협상은 상대방을 항복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대안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통상 우리는 입장과 명분으로 무장하고 만난다. 그래서 처음부터 상대방의 얘기에 마음을 닫는 경향이 있다. 마치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상대방에게 무너질 두려움에 빠진다. 이 때 당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당신의 제시한 것도 타당하지만,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함께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자고 해야 한다. 이 때도 역시 그 전의 실무 만남에서 감성적 훼손이 있었거나 언론을 통해 전달된 직설적이거나 저속한 언사로 상대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협상을 어렵게 한다.

정부와 버스노조와의 협상은 두 당사자가 대립하는 과정에서도 서로의 감정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고, 또 명분보다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대안으로 논의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시간과 더 많은 만남으로 보다 좋은 대안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협상 사례라 할 만하다.

직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상대의 공격에 대해 불편함을 참으며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고 말하는 은유와 품격이 갈등해결의 출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재근 유엔거버넌스센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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