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내음이 가득했던 봄이 지나가고 따스함을 머금은 여름 햇살과 바람이 다가온다. 어느새 5월이다. 5월의 푸른날, 오늘은 부여를 간다.

부여를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4번국도를 따라 시골길을 지나면 어느덧 부여의 초입이다. 사비도성(부여)에는 관북리유적, 정림사지 등 당시 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사비도성의 진정한 지배자인 성왕은 538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면서, 백제 중흥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성왕은 이를 위해 안으로는 정치·경제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외교·전쟁 등 적극적인 확장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하고 목이 없이 초라하게 돌아온 성왕은 처음 발걸음을 내딛은 사비에서, 영원한 안식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게 된다.

현재 백제 왕릉군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은 위치에 따라 크게 중앙·서·동 고분군으로 구분된다. 중앙고분군은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중하총(2호분)의 피장자가 성왕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중하총의 아래쪽에 위치한 동하총(1호분) 내부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백제 미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무덤의 구조와 형태 등을 통해서 피장자는 위덕왕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능산리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안타깝게도 우리의 손이 아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당시 조사를 통해서 고분의 구조와 형태가 확인되었지만 유물은 조사 이전에 모두 도굴되었다고 전해진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조사된 우리 문화재를 우리의 손으로 재조사하는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1917년에 조사된 능산리 서고분군에 대한 재조사는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타국에 의해 파헤쳐진 망자의 무덤을, 그것도 왕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무덤을, 100년만인 2016년에 우리의 손으로 절차에 맞게 제대로 조사하고 그 사실을 명명백백히 밝혔다는 사실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이와 관련하여 2018년에 진행된 익산 쌍릉(대왕릉)의 재조사도 백제 왕릉급 무덤의 구조와 피장자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조사·연구를 통해 백제 사비기 고분의 진정한 모습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삶은 요란하지만 죽음은 고요하다. 죽은자는 산자를 찾지 않지만 산자는 언제나 죽은자를 찾아간다. 그들은 그곳에서 잠든자를 만난다. 능산리고분군도 우리에게 그런 공간이다.

김환희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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