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거나 가까이 움직이는 세상 여러 일이 서로 닮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고 초록은 동색이며 콩 심은 데 콩 나는 이치는, 그 경우가 각각 다른데 쓰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모두 세상 일이 서로 유사해지는 원리를 따라간 결과이다. 그래서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라는 말다툼이 종종 일어나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불필요한 논쟁이기도 한 원인과 결과의 문제는 그 닮음의 영역에서 무화되기도 한다. 모두 같은 패거리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조를 만드는 것보다 이미 있는 구조를 바꾸는 일이 열배는 힘들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이미 있는 구조 안에는 그 구조의 힘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구조를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을 바꾼다는 것이고 또 그 사람과 이미 닮아 있는 또다른 사람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미 있는 구조는 그래서 바꾸기 힘들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 중 하나가 끝없는 변화라는 사실 또한 강조할 필요조차 없이 널리 퍼진 상식이다. 바뀌지 않는 것은 없으며 사람들이 집착하기 마련인 자아상이라는 것도 텅 비어 흘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매달리지 말라는 점은 부처의 오랜 가르침이다.

닮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변하는 것까지 닮아야 의미 있는 셈이다. 변하는 것을 빼고 자기들끼리만 닮는 집단을 두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그 집단이 결국 현상유지에만 급급하여 자신들 외부의 다양한 이질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 이질성과 맞춤한 교류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알맞은 교류를 위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상호 번역이 필요해진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 의미 옮겨놓기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번역은 서로 닮는 과정이며 서로 차이나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해 서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언어가 나라와 나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 안의 시대와 시대 사이에서도 필요하고 이념과 이념 사이에서도 필요하다. 그 번역을 통해 상호간의 삶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일이 가능하다. 번역을 통해 이해하는 일은 불필요하거나 해가 되는 것을 배제해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 이해와 포용과 적절한 배제가 없을 때 자기필요에 따라 제대로 이해못한 언어를 착취하여 잇속을 챙기려는 후안무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경우 자칫하면 난체하다가 곤경에 빠지게 되는데, 최근 모정당 원내대표가 `달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가 빠진 질곡이 그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의 최소치의 품격과 자세를 갖지 못한 사람이 벌어들인 자업자득인데, 문제는 일련의 사건으로 보건대 그가 그의 집단에서 더 많은 것들을 닮아 있으리라는 점이다.

번역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교류를 하는 정신적 행위들의 정교한 활동이다. 번역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이해가 무엇보다 필요한데, 그 이해가 또한 닮음의 과정이다. 이 닮음이 정신적인 것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벤야민은 `비감각적인 것의 유사성`이라는 미메시스 설명으로 알려줬다. 정신이 닮는다는 것, 그것은 삶의 방식이 닮는다는 것이다.

번역이 나라와 나라 뿐만아니라 시대와 시대 사이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다른 시대를 이해해서 자신의 현재 삶에 도움을 받아야 할 사업에서 우리 지역은 참으로 게으르다, 전국 어디를 가봐도 우리처럼 우리 삶의 흔적을 홀대하는 곳이 없다. 우리 시대 이외의 삶을 지금의 언어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짧게만 보아도 해방 이후 대전시가 출발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동안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다. 우리 시의 이른바 종복들이나 대표자들이 자신들의 치세시기에만 집중하는 결과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 집단 내부의 서로닮기에 지나지 않을텐데, 그 닮기가 무사안일주의의 표현이 아니기를 바랄뿐이다. 역시 최근의 일이다. 집권여당의 대표자들이 국가 관료들의 복지부동을 비판하는 대화를 나누다가 들켜버린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국민들에게 준 신의 두 가지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들은 국민이나 공무원들의 눈높이에 성실하지 못하고, 그래서 관료들을 비판할 뿐이고 공무원들은 역시 자기 앞가림만 열심히 하는 중이라는 사실에 대한 가르침 말이다. 문제는 그들이 서로 닮아 이제는 그들이 들어 있는 구조를 바꾸기가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시는 언제나 가야 자신들의 무사안일을 벗어나 과거에 말을 걸고 번역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박수연 문학평론가, 충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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