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중등 교사의 군더더기 없지만 명료한 부탁 전화 한통을 받았다. "학생들이 미술을 쉽게 이해하게 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나는 이것을 `미술(관)적 시간을 되찾자`는 과제로 받아들였다.

`미술(관)적 시간`이란 재일학자 서경식 선생이 어느 일간지 칼럼에서 언급한 `도서관적 시간`에 공감해 변형한 말이다. 선생은 자신이 만든 말인 `도서관적 시간`을 `신자유주의적 시간`의 반대어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시간`은 컴퓨터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던한 선진 기술이 가져다준 인터넷상의 시간이자 근대가 중심에 놓은 인간이 결여된 시간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신자유주의적 시간과 천황제라는 전근대적인 제도가 상호보완적으로 유착하고 있다는 서 선생의 비판적 성찰이었다. 알다시피 지난 1일 일본에서는 천황이 퇴위하고 새 천황이 즉위했다. 이와 함께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연호` 역시 바뀌었다. 한마디로 전(全) 세계의 보편적 시간으로서의 국제표준시간과는 무관하게, 천황의 신민(臣民)으로서 일본만의 시간인 연호를 사용하는 일본의 천황제와 단기적인 `비용 대 효과`로 계산되고 흘러가는 신자유주의적 시간이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앞서 언급한 두 시간에 의해 침식되고 있는 보편적, 인간적 가치를 살려낼 시간의 회복인 것 같다. 이는 내가 `미술(관)적 시간`을 되찾게 하자는 의미로 변환해 이해한 단서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벨기에 출신의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는 `미술(관)적 시간`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퍼포먼스를 기록한 비디오 형태의 작업들인데 `믿음이 산을 옮길 때`는 대표적이다. 알리스는 2002년 페루의 리마에서 500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그들과 함께 하루 동안 페루 외곽의 거대한 모래 언덕을 산으로 옮기는 퍼포먼스를 수행했다. 알리스가 처음 페루 리마에 방문한 2000년은 독재 정권의 마지막 시절로 만연한 부패에 대한 사회적인 긴장감과 저항의 움직임으로 혼란스러운 때였다. 결국 정부의 지도자는 탄핵됐다. 이 사태를 통해서 알리스는 신념을 바탕으로 산을 옮길 수 있음을 실행해보였다. 500명의 자원봉사자들은 하루 온 종일의 삽질로 500미터 길이의 모래 언덕을 약 10cm 정도 옮기는 데 성공했다. 10cm의 모래산은 몇 시간만 지나도 무의미해질 성과지만, 알리스는 이 퍼포먼스로 사회구성원의 신념과 행위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미술과 미술관의 사명은 인류의 행복에 봉사하고 그 삶에 경의를 바치는 데에 있다. 그 가치는 개인이나 사회시스템의 제한적인 수명과는 달리 항구적 성격을 지닌다. "학생들이 미술을 쉽게 이해하게 해 주세요"라는 어느 교사의 요청은 어떤 `의미`나 `내용` 없이 미술이 성립되지 않음을 함의하는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스마트폰의 검색기능처럼 간단히 답을 주지 않는다. 이는 관람자를 사유하게 하고 미술과의 끝없는 대화와 문답에 몰두하게 한다. 이 과정 자체가 곧 우리가 되찾아야 할 느리지만 깊은 `미술(관)적 시간`이다. 인류의 행복을 모색하는 미술이 주는 깊은 기쁨은 미술관에 있다.

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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