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에는 응답의 의미로 `대답 답(答)`을 쓴다. 그래서 반응이 느릴 때, 혹은 답이 없을 때 우리는 겹칠 답(沓)을 사용해서 `답답(沓沓)하다` 는 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답이 없어도 답답하고, 답이 겹쳐도 답답하다는 이야기다. `답`을 이루는 대답 답(答)자는 `대나무 죽(竹)`과 `합 합(合)`의 합성어이다. 질문에 부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자 합 합(合)을 유추해보면 말 그대로 `답` 은 대나무를 합친 무엇을 통해 전달되어지는 형태로서 연합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여러 개의 의견이 모여 `답`이된다. 한편 우리가 좋아하는 또 다른 답의 형태 `해(解)답`에 사용된 한자 해(解)는 `녹이다` 또는 `풀다`로 쓰인다고 한다. 얼어있던 것을 녹이는 것이 `답`이라는 거다. 이 점에서 질문은 규명의 기능을 하는 날카로운 성격의 것이며 답은 수용의 역할을 하는 너그러운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답은 `정(正)답` 으로 말 그대로 옳은 답이다. 어쩌면 정확하고 날카로운 `답`을 찾도록 길들여져 온 건 아닐까. 어떤 경우에도 답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단지 하나라고 믿고 싶은 것 뿐이다. 정확한 답을 찾아내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되던 학창시절, 나는 이것이 생각의 범위를 상당부분 한정하는 행위라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상상의 날개가 힘입게 펼쳐질 때 즈음, 상상을 멈추는 능력을 `성숙`이라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가 선택한 답으로 나를 알아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는 정답을 찾으려 그토록 애를 썼나 보다. 그러나 다른 답이 `답`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떠나는 여정 속에서 다름이 보여주는 가치를 만나게 된다. 류시화는 이것을 편견의 반대편에 서는 힘이라고 말했다. `가능한 빠른 답`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관점이 만들어내는 창의적 사고는 사실 가능한 많은 답들 속에 숨겨져 있다. 나는 이러한 관점이 예술영역에서 매우 활발하게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다.
예술의 영역은 잘 알려진 것처럼 많은 답이 존재하는 장이다. 이것은 답이 없는 것과는 달리, 많은 것들이 답이 될 수 있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수반한다. 정답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예술에서 빛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무능`이 예술에선 `유능`이 된다. 가능한 많은 것들이 답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존중이 넘치며 이해는 활발해진다. 반면 존중이 부족하다면 기대가 낮아지며, 이해는 둔탁하게 된다.
자연미도, 기하학적인 미도 모두 아름다움이다. 어떤 때는 딱딱하고 차갑게만 보이는 예술품이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는 것처럼 때로는 자연미가 가득한 오래된 회화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초연 하게 한다.
사진이 우리를 언제나 `현재`에 고정시키듯 답을 찾아 떠나는 자는 언제나 같음과 다름 사이에서 `새로움`을 마주한다. 다른 것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 그 경이로움을 위해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잠시 쉬게 하자. `가능한 많은 답들`에 대한 이야기는 조급한 사람들에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의 정돈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가능한 많은 답들이 가지고 있는 거리감이다.
김태호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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