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는 공을 세운 무장에게 내리는 최고의 시호다. 보통 이순신 장군의 위명이 워낙 압도적이라 충무공 하면 이순신이 떠오르지만 500년 조선 왕조에서 모두 9명이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그 중 다음으로 유명한 이는 남이 장군이다. 그는 무예가 매우 뛰어나 당대에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됐다. 명나라의 사신이 세조와 함께 그의 활 쏘는 모습을 지켜보다 "이런 좋은 장수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고 감탄했다고 전한다. 저잣거리에는 귀신도 두려워 도망친다는 이야기가 회자됐을 정도다.

17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후 반란을 진압하고 여진족을 평정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28세에 병조판서에 임명됐으니 그 능력을 짐작케 한다. 지금으로 치면 20대에 국방부 장관이 된 셈이다. 김구 선생이 인용해 유명한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케 못 한다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라는 시에는 그의 호방한 기세가 잘 드러나 있다.

남이는 세조로부터 총애를 받았지만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운명이 달라진다. 예종은 원래부터 남이를 좋아할 수 없었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남이는 눈 안의 가시였다. 유자광과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의 모략은 남이를 쳐내기 좋은 구실이었다. 예종이 즉위한 해인 실록에는 1468년 10월 24일자로 유자광이 남이의 역모를 고변하는 내용이 있다. 3일 후 남이는 처형되고 다시 3일 후 유자광은 무령군으로 봉해진다.

영웅의 가장 큰 적은 간신들이다. 간신은 사악한 갑질을 일삼는 백성의 적이기도 하다.

28일은 이순신 탄신일이다. 이순신 역시 선조의 질투를 이용한 간신들 때문에 고초를 겪은 영웅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빠져들었던 깊은 시름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왕과 간신들의 모략을 걱정하는 고민이었을까.

이낙연 국무총리는 28일 충남 아산시 백암읍 현충사에서 열린 이순신 장군 탄신 기념다례 기념사에서 "국난의 시대 충무공이 계셨던 것은 우리 민족의 다시없는 축복이었다. 위대한 충무공을 지킨 백성 또한 위대했다"고 말했다.

역사 속에서 영웅은 종종 등장한다. 그가 오래도록 세상을 지킬 지 찰나에 사라질 지는 백성들의 몫이다.

이용민 지방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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