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들이를 나선다. 옷장을 열어 밝고 가벼운 옷을 고른다. 하얀 티셔츠, 살구색 바람막이, 밝게 물 빠진 청바지, 새하얀 운동화. 요즘 날씨엔 좀 추울 수도 있지만, 칙칙하게 들러붙은 미망과 고뇌를 털어내는 데는 찬바람이 요긴할지도 모른다.

현관문을 나서니 바람이 목을 스친다. 느낌이 좋다. 차에 시동을 걸고 클래식 채널에 라디오를 맞춘다. `피가로의 결혼`이 흐르고 있다. 순백의 드레스에 분홍 부케를 든 신부가 떠오른다. 가슴이 음율을 타고 가벼이 요동한다.

얼마쯤 차를 달려 이차선 도로에 다다르니 탄성이 나온다. 이럴 줄 알았다. 꺼멓고 칙칙하게 뒤틀린 벚나무 가지가 폭발하듯 제 몸을 사르고 있다. 우윳빛 꽃 무더기는 봄의 심장을 뚫고 나와 넘실거린다. 절정의 순간을 견디고 견디다 마침내 분출해놓은 사랑의 액체 같다. 꽃잎들이 봄바람에 폴랑폴랑 몸을 떤다. 대청호로 내쳐 달려야겠다. 도심의 빌딩이 없는 온전한 꽃길로 가자.

폐고속도로, 버려진 터널을 지난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 `설국`의 첫 문장처럼 터널 끝 꽃으로 가득한 화국이 펼쳐질 생각에 숨이 가빠진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들이였다. 나무들은 아직 견디고 있었다. 꽃봉오리는 여인의 젖꼭지처럼 부풀었건만, 붉게 상기된 채 버티고 있다. 다 보여줄 수는 없노라고. 피고 나면 시드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항의하듯 한 송이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 엊그제 눈처럼 빛나던 목련도 하룻밤 서리에 황갈색으로 스러지지 않았느냐. 갓 태어난 병아리 같던 개나리도 듬성듬성 꽃송이를 떨구고 성긴 팔을 힘없이 흔들지 않느냐. 눈 속에서 일찌감치 봄과 밀회하던 청매화도 잎새에 자리를 내주고 말지 않았느냐.

생각의 촉수는 글쓰기로 향한다. 글을 써야 한다. 자연의 이치처럼 우리는 언젠가 시간 앞에 부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써야 한다. 단 한 사람에게일지라도 감동을 주고 위안이 된다면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좋은 봄날, 이렇게 슬프게 글쓰기의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아직 피지 않은 꽃이 더 아름답다는, 그 가슴 시린 역설이다.

마기영(수필가,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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