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권력을 수반한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표정으로부터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표현적 수단은 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로 나뉘는데 말과 글이라는 언어적 요소만으로는 자신의 뜻을 모두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비언어적 요소로 언어적 한계를 보완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다문화가정의 한 아이가 국어수업을 들어왔다. 수업을 듣다말고 대놓고 엎드린다. 나는 대놓고 꾸짖는 것이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여 쉬는 시간을 기다려 소곤소곤 말했다. "혹시 내용이 어려워서 그러니?" 그러자 난해한 표정을 지으며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돼,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아이의 말뜻을 헤아리려 온갖 지각을 동원해 생각해 봤다. 이 아이를 위해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돼,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인지?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돼, 한국어를 잘 못해서 죄송합니다`인지? `한국에 와서, 죄송합니다`인지 알 수 없는 그 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사회도 구호처럼 다문화주의를 표방한 지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우리의 언어문화는 안 그런가 보다. 특히 한국사회의 보수성은 한국어의 언어문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어에 발달한 높임법과 첨가어(조사, 어미)의 발달은 한국인의 섬세한 감정표현과 가족제도의 온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나이, 학교, 직업, 직급, 성별 등으로부터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극단을 표출하는 갈등의 씨앗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두 사람이 만나면, 먼저 위계 관계(나이, 성별, 직급 등)를 정확히 확인한 후 상대방과 대화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와 갈등이 만들어지기 십상이다. "나는 비빔밥을 먹겠다", "저는 비빔밥을 먹겠습니다"

지칭어(나, 저)부터가 자신을 낮추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고, 종결어미에서도 듣는 이를 존대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처음 보는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를 가정해 보면 한국어에 나타나는 존비어 체계가 서로의 감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한국어는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서 나는(동등, 우월 관계), 제가, 저는(동등, 하급자), 소인(하급자), 본인은(수평 관계, 문어체) 등으로 인지구조가 바뀐다. 영어에서는 상대가 누구든지, 신분이나 지위가 높던 낮던, 대문자 I를 써서 표현하는 것과 상당히 비교된다. 때문에 서열이 명확하지 않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대화할 때, 서로 신경전이 대단하다. 회사 하급자나, 학생이 회사 상급자나, 교사에게, "그건 내가 할게요", "내 생각은..."이라고 한번 해보자. 상대방의 반응이 어떨까? 이렇듯 언어를 통한 위계설정이 매우 강력한 것이 한국어의 특징 중 하나다.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의 기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서로 시비 붙기 좋은 특성을 가진 것이 한국어이다. 회의, 토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는 것도, 신분에 따라서 쓰는 어휘와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칭문제, 존댓말, 반말 시비로 폭행과 살인까지 저지른 사건사고는 한국사회에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외국인의 눈에는 어쩌면 21세기 평등사회에서도 이러한 존비어 체계로 갈등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일 지도 모르겠다. 국어의 위상을 높이겠다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지만 정작 우리말에 내재하는 이러한 갈등의 불씨는 모른 체 하는 현실이다. 언어가 지닌 힘은 역사 속에서도 익히 경험해 온 우리가 왜 우리말을 아끼고 가꾸는 일에는 소홀한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외세의 침략 속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온 우리말이다. 언어는 생명력을 지니므로 반드시 유물처럼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이제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발맞추어 한국어의 위상도 더욱 커지고 있다. 다문화 사회로 급속히 진입하고 있는 현실에서 양방향 의사소통에 걸맞는 언어예절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회적 위계질서에 의한 비어(卑語) 사용을 지양하고 모두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존댓말을 생활화하는 길이다.

최강 미담국어논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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