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

삼성전자 직원 2000명이 머리띠를 두른 채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운동장 한복판에는 15만대에 달하는 휴대폰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0여명의 직원이 휴대폰에 망치질을 하는가 싶더니 조금 뒤 박살난 휴대폰에 불을 붙였다. 당시 물가로 환산했을 때 500억원에 달하는 돈이 하루아침에 한줌의 재가 돼 버린 것. 오늘날 삼성전자 스마트폰 `갤럭시`가 시장 1위를 차지한 원동력이자 뿌리가 된 `애니콜 화형식` 장면이다.

애니콜 화형식의 발단은 1994년 10월 오랫동안 고생해서 출시한 휴대폰 애니콜 SH-770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제품은 출시하자마자 시장 점유율 30%를 장악했지만 제품 불량률이 11.8%에 달하면서 여기저기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희 당시 회장은 신문에 불량 제품을 교환해주겠다는 광고를 실었고, 수거된 불량 휴대폰만 15만대에 달했다. 이렇게 단행된 화형식은 4개월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삼성전자 애니콜이 미국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국내 시장 1위로 올라선 것.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셈이다.

더이상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전 미술계에도 내달 5일부터 5월 30일까지 화형식을 예고한 전시가 열린다고 한다. 류병학 독립큐레이터의 아이디어로 출발한 `워크 버닝` 전이 그것이다. 작품이 판매되지 않는 작품은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전시다. 더욱이 이 극단적인 전시에 참가한 작가들은 `워크 버닝 2탄`에 초대할 작가도 1명씩 선정해야 할 부담까지 안고 있다. 다소 무모하기기까지 한 모험적 전시에 놀라운 것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9명이 순수히 동의했다는 점이다. `대전에서 전시·공연이 성공하면 전국 어디든 통한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대전에서 그것도 `솔드 아웃`에 도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 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예술은 가난하고, 알아줄 때까지 손 벌리지 않는다`며 안주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벼랑 끝에 내몰면서까지 변화하려는 움직임은 이전과 달라진 양상이다. 침체된 대전미술계에 `불` 질러버리는 전시를 만들어 놨으니 이제는 시민이 화답해 줄 차례다.

원세연 취재 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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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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