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봄 어느 날 필자는 종로 2가의 종로서적을 방문해 책들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매우 반가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2층 서점을 시계방향으로 돌며 출구를 나오기 전 잠깐 멈춰 왼쪽 서가를 보는 순간 『김교신과 조선』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당시 필자는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탐독하는 중이었고, 함석헌 선생님이 자신의 친구 김교신을 여러 곳에서 언급했던 터라 매우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함석헌 선생님은 8·15 해방 100일 전에 돌아가신 친구 김교신을 아쉬워하면서 늘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김교신과 조선』을 발견하고 필자는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당시 집을 떠나 공부하며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필자에게 『김교신과 조선』은 하루하루를 지탱해주는 인생 책이었다. 책 표지에는 김교신 선생님의 생기 넘치는 얼굴 사진이 있었는데 필자는 그 얼굴 사진을 보고 혼자 용기를 내곤 했다. 김 선생님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영웅인 손기정 선수를 지도한 은사이다. 양정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김 선생님은 제자이던 손기정과 도쿄에 동행해서 손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예선전을 응원했다.

훗날 손기정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스승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교신은 1944년 7월 흥남의 일본제국주의 회사에서 한국인의 노무와 인권을 위해 일하였지만 일본회사와 일본인은 그가 사망했을 때에 순직으로 처리하고 회사장으로 장례를 치러줄 만큼 큰 인물이었다.

김 선생님은 함흥 태생인데 일본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다니기 전까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간조 선생의 성서 강의에 7년간 참석했다. 우찌무라는 일본인이지만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천황은 왕이 아니라 국민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그에게 경배하는 행위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김교신은 무교회주의보다 성경중심주의라는 표현을 더 좋아했으며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든 자리가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찌무라는 성서를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과 대화하는 일대일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으며 교회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본질적이라고 보았다.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으며 유학하던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은 동경에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말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은 1927년 동경에서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1930년부터 김선생님 혼자 발행하던 <성서조선>은 1934년부터 1942년 폐간될 때까지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물 압수와 출판금지 처분을 10여 차례 받았다. 함석헌 선생님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것을 연재하였고 이후 한 권의 책으로 간행한다. 그 책은 나중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제목이 수정되었는데, 필자는 고 3때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하루만에 감동을 받으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성서조선>은 1942년 폐간되는데 3월 1일자 권두언으로 실은 조와(早蛙)라는 글 때문이었다. 조와는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내용이다. 개성의 송도고보에 근무하던 선생님은 새벽이면 송악산 골짜기에 들어가 기도했다. 김 선생님이 찬송을 하면 개구리들도 반기며 주위에 몰려들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이 찾아와 개구리의 생사를 살피던 중 개구리가 동사한 것을 발견하고 매장해주었다. 그러나 아직 개구리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어서 전멸은 면했구나라고 감동하며 글은 마무리된다. 이 글에서 김교신은 추운 겨울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개구리처럼 강인한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표현하였다.

총독부는 민족혼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트집을 잡아 성서조선을 폐간했다. 이 사건으로 김교신과 동지 13명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오래전 일이지만 31절 100주년을 기념하는 3월을 보내며 김교신 선생님의 정신을 되새겨 본다.

정영기(호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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