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코뿔소(Gray Rhino). 2013년 미셸 부커(Michele Wucker) 세계정책연구소 대표가 다보스포럼에서 중국경제의 위험요인을 언급하며 알려진 용어이다. 코뿔소는 덩치가 크고 지나갈 때면 땅이 흔들릴 정도여서 이를 인지하기 쉽고 달려들면 큰 위험이 닥친다는 것을 잘 안다. 이렇게 위험을 예상할 수 있고 사고가 나면 통제 불능에 빠질 수 있지만 예측이 가능하다는 데 편안함을 느껴 오히려 이를 무시하게 되는 상황을 회색 코뿔소라 일컫는다. 이러한 면에서 한번 발생하면 큰 충격을 주지만 발생 확률이 매우 낮아 예측 및 대비가 어려운 사태를 의미하는 `블랙 스완(Black Swan)`과는 비교될 수 있다.

요즘 우리 지역 경제지표를 보면 문득 회색 코뿔소가 떠오른다. 주력산업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다. 알다시피 충남 경제는 2000년대 이후 대규모 제조업 생산시설 집적과 주력 산업의 호조로 빠르게 성장했다. 2000-2017년 중 충남 지역내총생산(GRDP) 성장률은 연평균 6.6%로 전국 16개 광역시도 중 1위였을 뿐 아니라 전국 평균(4.0%)에 비해 1.6배 이상 높았다. 5대 주력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가 충남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총생산액의 58%, 고용의 38% 수준이며 수출은 71%에 이른다. 제조업이 서비스업 등에 미치는 연관 효과를 고려하면 그 영향은 더욱 막대하다.

이러한 지역 주력 제조업이 연초부터 심상치 않아 보인다. 충남 수출 47%를 차지하는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12월 감소로 전환된 후 올해 감소폭이 더욱 확대됐고 디스플레이도 스마트폰 판매 부진 등으로 수출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자동차 역시 내수판매 부진 등으로 불황이 장기화되고 있고 철강은 전방산업 부진으로 개선세가 미약한 실정이다. 그나마 석유화학이 선방하고 있으나 최대 수요국인 중국의 성장 둔화로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이다. 미중 무역분쟁의 영향과 함께 G2인 미·중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가 감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더 큰 걱정은 이들 주력산업의 경쟁력이다. 지난해 한 민간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출상위 8대 업종의 글로벌 경쟁력 우위품목은 2018년 현재 무선통신기기, 디스플레이, 석유제품, 선박 등 4개지만 3년 후에는 선박만이 경쟁력을 유지할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최대 경쟁국인 중국이 3년 후 무선통신기기, 디스플레이에서 한국을 추월하고 철강과 석유제품에서는 경쟁력이 비슷해질 것이란 평가다. 이러한 평가는 전문가 대상 단순한 서베이 결과인 데다 그간 이와 유사한 연구나 언론 보도가 많았기 때문에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최근 우리 지역 상황이 더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지난 달 SK하이닉스가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로 용인시를 선정하고 10년간 12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뜩이나 후공정 중심으로 부가가치 창출이 낮은 충남 반도체 산업 입장에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현대차가 중국 1호 공장을 폐쇄하고 인력감축에 나섰다는 뉴스도 남의 일이 아니다. GM대우 사태나 조선업 불황 등으로 지역경제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타 지역의 사례를 떠올리면 걱정이 앞선다.

지금 우리 경제는 패러다임의 구조적 전환기 속에서 주력산업 재편이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강화,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 지역경제의 활력을 높이는 방법은 결국 주력산업의 경쟁력 강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적극적인 R&D를 통한 생산성 향상, 기술혁신을 통한 가치사슬 업그레이딩,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융합화 등 많은 아이디어가 제시되어 왔다. 지금은 실행에 옮길 때이다. 자꾸 머뭇거리다간 회색 코뿔소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오영주 한국은행 대전충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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