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전략적 판단에 따른 예고된 정국파행

진보와 보수를 떠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주권자들을 위한 정치`다. 당리당략이나, 개인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과 국익이라는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봉사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믿는 이는 많지 않다. 오죽하면 국가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꼴찌는 늘 국회의 몫이겠는가. 잘하라는 것도 아니다. 제발 싸우지만 말라는 것도 따르지 못하는 게 우리 국회다. `강대강 대치`, `파행`, `동·식물 국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다.

선거제 개편과 패스트트랙을 둘러싼 현재 국회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어찌 보면 그들의 밥그릇 싸움인데,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낼 듯 갈등의 골을 심화시키는 모양새다. 국익과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대립하고 있지만, 당리당략에 근거한 전략적 행보일 뿐이다.

우선 선거제 개편에 합의한 여야 4당은 공히 대승적 양보를 주장하고 있지만, 속내를 보면 저마다의 이해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민주당은 선거제와 함께 개혁입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려 한다. 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은 형사사법 시스템의 틀을 고치는 일로 국민의 기본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안이다. 선거법과는 별개로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입법하는 게 순리다. 하지만 민주당은 소수 정당의 숙원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지지해준 대신,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 법안들을 쉽게 관철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받아낸 셈이다. 나아가 선거제 개편은 패스트트랙에 올려지더라도, 향후 여야 협의가 진행될 개연성이 커 민주당으로선 의석 수 손해 없는 개편안으로 회귀하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다. 결국 내준 것 없이 개혁입법만 챙길 개연성도 있다는 것이다.

민주평화당에선 지역구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대의를 추구했다는 입장이나, 정당득표율에 따라 권역별 비례대표가 배정되니 아직 유불리를 단언할 수 없다. 게다가 지지기반인 호남권에서 특히 민감한 5·18왜곡처벌법 처리를 패스트트랙 전제조건으로 내세웠으니, 나쁜 거래는 아니다. 바른미래당도 의석 수 증감에 대해선 예측이 쉽지 않다. 다만 김관영 원내대표는 공수처법에 바른미래당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패스트트랙에 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야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정책정당이자, 양당 기득권을 깰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정당으로서의 입지를 찾아가는 데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물론 내분이 잘 수습됐을 때에 한해서다.

`제1야당 패싱`이라며 연일 강도 높은 대응에 나서는 한국당 입장에서도 모든 게 손해는 아니다. 선거제 개편문제가 패스트트랙에 태워진다 해도, 원안대로 확정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분위기다. 게임의 룰인 선거제를 바꾸는데, 제1야당을 완전히 배제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야 4당 협의안대로 처리될 가능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려했다면, 이번 파동과정에서 `지역구를 더 늘리고, 비례대표를 아예 없애자는` 협상 안을 당론으로 제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4당으로부터 공격받는 게, 보수진영의 결집차원에서 나쁘지 않다는 정략적 판단에 따라 스스로 `따돌림`을 유도했다는 말까지 나돈다.

허탈한 얘기지만 결론은 뻔하다. 한동안 극한 대결양상을 계속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 도래하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아 당리당략에 근거한 개편안을 도출해낼 것이다. 타협의 공(功)은 `내 탓`이고, 비난받을 과(過)는 `네 탓`을 주장하면서 말이다. 극단적 대립을 피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당의 책무이나, 작금의 한국 정당들은 이러한 대치구도를 통해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할 뿐이다. 그들이 민의를 무서워할 수 있도록 선거제를 개편하려면, 게임의 룰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 당사자들이 룰을 정한다는 것은 또 다른 특권이다. 이제라도 정치인이 아닌 국민들이 선거제 개혁을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할 때다. 송충원 서울지사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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