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좌안 쌩줄리앙의 샤또 딸보처럼 쉽게 발음하고 기억할 수 있어서, 우안 의 샤또 피작(Figeac)은 우리나라 와인 애호가들에게 친숙한 와인입니다. 2세기 로마시대에 현재 와이너리가 위치한 자리에 건물과 영지를 소유했던 피자쿠스(Figeacus) 가문명에서 샤또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쌩떼밀리옹에는 와인명에 `피작`이 들어있는 샤또들이 많은데, 샤또 피작의 일부였다가 분화된 와이너리가 무려 14개에 달합니다. 1832년에는 샤또 슈발 블랑의 시초가 되는 일부(7ha) 포도밭을 팔기도 했는데, 일시적으로는 슈발 블랑 와인이 샤또 피작의 이름으로 판매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경영난으로 1838년 130헥타를 매각했다는 기록도 있기에, 샤토 피작은 현재(54ha)보다도 훨씬 넓은 쌩떼밀리옹을 대표하는 와이너리였습니다.

샤또 피작은 빙하기에 프랑스 중앙산맥에서 이즐(Isle)강 등에 의해 흘러온 모래성 자갈 충적토가 7미터 깊이로 쌓인 토양의 3개 언덕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샤또 페트뤼스 등에서 발견되는 `블루 클레이` 등의 점토질 토양도 섞여있습니다. 쌩떼밀리옹에서는 예외적으로 자갈 토양에 적합한 까베르네 쇼비뇽을 35%나 사용해서 `생떼밀리옹의 메독 와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1892년에 마농꾸르(Manoncourt) 가문의 소유가 되었는데, 현재의 샤또 피작의 명성 수립에는 창립자의 증손자인 띠에리(Thierry) 마농꾸르의 역할이 컸습니다. 1910년생인 그는 농공학을 공부한 뒤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와이너리 경영에 참여하여, 유용한 전통적 방식은 유지하면서 토양 분석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테크닉을 적용했습니다. 서로 다른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들을 한꺼번에 섞지 않고 분리해서 양조·숙성하는 방식도 도입했습니다. 현재 특급 와이어리 대부분에서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샤또 피작은 쌩떼밀리옹의 1955년 첫번째 등급 선정부터 1급 그랑 크뤼 클라세를 받았고, 이후 6차례의 등급조정에도 계속해서 1등급B를 유지해왔습니다.

참고로, 쌩떼밀리옹 포도밭의 약 12%가 그랑 크뤼 클라세이며, 단지 2.8%만 1급 그랑 크뤼 클라세입니다. 이들 그랑 크뤼 클라세에 선정될 수 있는 대상 포도원은 `쌩떼밀리옹 그랑 크뤼` 명칭(AOC) 와이너리에 한정되는데, 이들은 매년 평가를 통해서 선정되며, 전체 쌩떼밀리옹 포도밭에서의 비중은 약 60%입니다.

띠에리 마농꾸르가 결정한 까베르네 쏘비뇽 35%, 까베르네 프랑 35%, 메를로 30%의 재배 품종의 균형적인 구성은 보르도 와인 중에 유일한 `피작 스타일`을 탄생시켰습니다. 까베르네 쏘비뇽은 초기에는 화려한 꽃향기를, 숙성되면서 구조감을 제공합니다. 까베르네 프랑은 타닌에 신선함과 섬세함을, 메를로는 풍만함과 유려함에 기여합니다. 1971년에는 새로운 양조시설을 구축하여 언론으로부터 `쌩떼밀리옹의 파라오(Pharaoh)`라는 칭호도 들었다고 합니다.

샤또 피작은 바로 옆에 위치한 샤또 슈발 블랑에 근접한 와인을 생산한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초기에는 좀 더 절제되고 과묵한 인상을 주는데 숙성되면서 박하, 허브, 삼나무 등의 풍부한 향이 일품입니다. 화요일 저녁, 미세먼지가 잠깐 물러난 저녁 식사 후 산책길에서 오랜만에 붉은 저녁 노을을 잠깐 볼 수 있었는데, 2016년 여름 샤또 피작에서 맛보았던 2011년 빈티지의 우아함과 주황색으로 멋지게 도안된 라벨에서 느꼈었던 따스함이 기억되더군요.

신성식 ETRI 미래전략연구소 산업전략연구그룹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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