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1 항공기. 사진=공군 제공
KT-1 항공기. 사진=공군 제공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나라 영해를 지켜온 공군 항공기·구축함은 무엇일까.

광복 이후 공군 항공기, 해군 구축함은 초기 대부분 미군의 지원을 받았지만 공군은 1953년 국내 기술로 항공기를 직접 생산하는 저력을 보인다. 공군 최초 군함과 참모총장을 각각 알아본다.

◇공군 창군과 `L-4 연락기`=조국이 독립한 후 최용덕 장군 등 뜻 있는 항공인들은 공군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상황은 "한국의 육군이 충분히 성장한 뒤 논의할 문제", "공지합동작전을 위해서는 공군을 육군 예하에 두는 것이 효과적" 이라며 반대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항공인들의 주장도 강경했다. 이들은 "현대전은 입체전이며 공군세력의 우세 없이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따라서 항공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군을 육군에서 분리해 3군의 균형화를 이뤄야 한다"고 공군 독립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를 위해 초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정렬 장군이 `항공의 경종`이라는 책자를 발간해 정부와 관계기관에 배포하고, 최용덕 장군이 군복을 벗고 초대 국방부차관으로 취임해 육군과 정치인들을 설득하는 동시에 국군조직법상에 공군 조직의 가능성을 명시하는 등 다각도로 그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대통령령 제254호 `공군본부직제`에 의거 대한민국 공군이 창군됐다.

공군은 창설 초기 전투기 한 대 없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L-4 연락기 10대로 시작했지만, 이 항공기가 초창기 항공인들에게 준 감동과 의미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공군이 창설되기 직전인 1948년 9월 13일, 항공부대는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를 인수해 우리 기술진으로 조립을 완료했고, 우리 조종사들은 단 한 번의 시승만으로 이 항공기로 동시 이·착륙과 편대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미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며칠 후 9월 15일에는 태극표식이 선명한 L-4기 10대가 편대군을 이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서울상공에서 비행을 했다.

◇최초의 국산 항공기 `부활호`=`부활호`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자체 제작한 동력비행기이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지 50년만에 우리도 항공기를 만든 것이다.

1953년 항공기 설계제작을 위한 실습용 및 조종사 연습기로 사용할 수 있는 항공기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공군은 정비사를 양성하는 공군 기술학교의 교관을 중심으로 같은 해 6월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당시, 제작 여건은 어렵기만 했다. 27명의 제작팀은 사천기지 자재창고의 허름한 막사에서 설계도를 그렸고, 부족한 자재를 발로 뛰어 직접 구했다.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부품은 미 공군기지를 샅샅이 뒤져 모았다.

드디어 1953년 10월 11일 사천기지에서 기폭 12.7m, 기장 6.6m을 가진 2인용 경비행기 `부활호`가 시험비행에 성공한다. 민영락씨가 시험조종사로 나섰고 제작자 이원복씨가 후방석에 동승을 했다. 첫 시험비행시 약 2시간 동안 고도 1300m까지 비행했다.

`부활호`는 중량 380kg, 상승고도 4900m, 최대속도 180km, 추력 85마력이며, 천으로 동체를 만들었다. 또한 삼면이 바다인 국내의 여건을 고려해 부양체를 달면 수상기가 되도록 설계했다.

4개월만에 우리 손으로 비행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국내에서도 놀라울 정도였다. 1954년 4월 3일 함태영 부통령 주관으로 김해기지에서 명명식을 가졌다.

이 항공기는 1955년까지 연락기와 연습기로 활용되다가 이후 한국항공대학(대구 달서구 경상공업고등학교 전신)에 기증돼 1960년까지 학생들의 연습기로 사용됐다. 2004년 경상공업고등학교의 지하창고에서 뼈대가 발견되어 같은 해 공군이 복원에 나서 51년만에 다시 살아나 공군사관학교에 전시됐다.

◇국산 기본훈련기 KT-1=우리나라는 국토 규모가 작고 자원이 빈약하지만 인적 자원이 우수해 항공우주산업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꼽는다. 정부에서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항공산업을 채택해 그동안 정책적인 개발을 주도해왔다.

국산 기본훈련기 KT-1은 1988년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개발을 시작해 설계-제작-비행시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의 시간과 10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 노력 끝에 개발된 세계적인 수준의 국산 항공기다.

1991년 12월 12일 초도비행에 성공한 KT-1은 1995년 11월 28일 15혼성비행단에서 `웅비(雄飛)`라는 이름으로 명명식을 가졌다.

2002년에는 세계 3대 에어쇼 중 하나인 `싱가포르 에어쇼`에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유일한 `자국 생산 항공기`로 출품되어 짧은 이·착륙 거리, 낮은 실속 속도, 스핀 회복 기능 등 우수한 성능으로 각국 시승단으로부터 `동급 기종 중 가장 성능이 뛰어난 항공기`라는 극찬을 받았고, 이후 인도네시아, 터키 등에 수출됐다.

공군은 2000년 9월 양산 1호기를 도입, KT-1을 기본 비행교육과정에 도입해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과 함께 국산훈련기를 활용한 선진비행교육체계를 실시하고 있다.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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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4. 사진=공군 제공
L-4. 사진=공군 제공
서울 상공을 전시 비행 중인 L-4 연락기들. 사진=공군 제공
서울 상공을 전시 비행 중인 L-4 연락기들. 사진=공군 제공
명명식에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부활호의 당찬 모습. 사진=공군 제공
명명식에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부활호의 당찬 모습. 사진=공군 제공
KT-1 기본훈련기에 대한 웅비 명명식이 1995년 11월 28일 제15혼성비행단에서 거행됐다. 사진=공군 제공
KT-1 기본훈련기에 대한 웅비 명명식이 1995년 11월 28일 제15혼성비행단에서 거행됐다. 사진=공군 제공

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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