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4월 11일로 변경해

오랜 논란 끝에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4월 11일로 확정돼 올해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은 의미가 남다르다. 정부가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임정수립의 역사적 의미를 국민과 함께한다는 측면에서 반길만 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임정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 열었지만 올해부턴 이틀 앞당긴 4월 11일로 변경해 갖기로 한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임정수립 기념일이 변경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계의 끈질긴 자료 추적과 전문가 토론 등을 거쳐 30년 만에 바로 잡은 것이다. 그래서 올해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는 더 크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임정 기념일이 왜 이틀 앞당겨졌을까. 백 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궤적을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당시는 망국의 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극렬했던 때다. 1919년 독립운동 거점지였던 중국 상하이.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물물교환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국제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의 독립을 갈망한 독립지사들이 이곳 상하이로 몰려든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외국 공관이 몰려 있어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상하이가 독립지사들의 주요 할동무대가 된 것은 일제의 간섭이 덜한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조계(租界)와 쑨원이 이끄는 광동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그 해 국내에서는 고종이 승하한 후 3월 5일 장례식이 잡혔다. 많은 조선 군중이 몰릴 장례식 날을 3·1운동 거사로 잡았고, 이후 3·1운동이 들불처럼 일기 시작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하이로 집결한 독립지사들은 3·1운동이 전국으로 번지자 국민의사를 대표할 의결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다. 상하이에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한 독립지사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꺼내 들었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일부에선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상조란 주장도 있었지만 임시정부 수립론을 꺾지 못했다.

그러다 4월 10일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29명으로 구성된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논의를 벌였다. 밤샘 회의 끝에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국무총리 등 정부 각료 선출을 마친 뒤 이튿날인 4월 11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있기까지 상하이, 광저우 등지로 일제 탄압을 피해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했다. 27년간 일제와 숨바꼭질 하며 옮겨간 거리만 3000km에 이른다.

그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4월 11일)과 한성 임시정부 수립일(4월 23일), 임시정부 통합일(9월 11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기념식을 4월 11일 했다는 기록과 자료가 새로 발견되면서 이날로 변경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4월 13일은 자료의 오류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1989년 기념일 지정 후 30년 동안 엉뚱한 날 생일을 차렸으니 정부의 역사인식을 탓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날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면 소비 진작 목적이 아닌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첫 임시공휴일이 된다. 헌정사상 61번째다. 국민 10명 중 6명은 임정수립 기념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할 것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 등이 쉬게되면 워킹맘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데다 기업의 휴일 수 증가에 따른 생산성 저하 우려 등을 감안해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헌법 전문처럼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법통을 바로잡은 것은 백 번 옳은 일이다. 민족정기를 바로잡은 만큼 국민적 감동을 주는 첫 생일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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