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는 결코 신뢰받지 못한다. 계량화도 대책이 안 된다. 모두가 인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점 없이(그런 기준점이 불가능하다!) 다분히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계량화는 딱한 숫자 놀음일 뿐이다. `판단`이나 `감상`을 수치화라는 것부터가 신뢰받기 어려운 일이고, 사람마다 판단과 감상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을 결정하는 누군가가 있다. 사실 이분이 모든 심사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분이 어떤 영향력 있는 자의 청탁이나 압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혈연·학연·지연 등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알아서 뭐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이 정한 합리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객관·공정한 분들을 선택했다면 일단 최상의 심사위원 구성일 테다.

그런데 이 단계부터 절대적인 의심을 받는다. 실무자의 기준이 과연 공정했는가. 저 무수한 철밥통 심사위원들은 뭔가? 왜 누구나 예상할 만한 사람이 되겠는가. 불특정다수의 심사위원 풀에서 심사 임박 때마다 랜덤으로 뽑기도 하는데, 그 심사위원 풀은 누가 또 어떻게 선정해서 구성했는가? 의심하기로 들면 한없이 의심스럽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심사위원들이 정해졌다. 심사위원들이 어떤 로비도 받지 않고 어떤 인연에도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공정한 잣대로 심사했다고 하자. 그게 가능해? 역시 엄청 나게 의심 받는다. 여러 가지 의심을 받지만, 가장 큰 의심은, 그 심사위원 개인의 잣대가 과연 공정할 것이냐는 것이다.

누가 봐도 공정한 심사위원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게 공정하게 심사를 보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신뢰받기 힘들다. 왜냐면 혼자 심사 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인지 당연한 일인지 아리송하지만 만장일치가 거의 없다. 합의점을 찾으려고 한다. 두어 분이 `최고`라고 강력히 주장하면 될 확률이 아주 높다. 다섯 사람이 `보통`이라고 본 작품이, 한두 사람이 `최우수`라고 주장한 작품들을 이기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우수하다고 보지도 않았는데, 한 사람이 죽어도 이것이라고 우겨서 1등이 결정되는 때도 있다. 결국 다수결을 자주 한다. 합의가 이루어질 때 최선의 방법은 다수결밖에 없으니까. 하도 의견 일치가 안 돼 `당선작 없음` 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심사위원부터가 만장일치하지 못한 작품이 대중 사이에서 두루 신뢰받기는 어려울 테다. 심사위원이 만장일치했다고 해서 대중에게 무조건 신뢰받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판단해서 아니면 대중은 아무렇지도 않게 심사위원을 욕한다. 보는 눈이 꽝이네!

즉, 제 아무리 공정하게 위촉된 심사위원이 제 양심과 상식과 체면을 걸고 제 아무리 공정하게 심사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최고`이거나 다수결이나 합의상으로는 `최고`일 수 있지만, 모두에게 `최고`인 작품·사업은 절대로 뽑힐 수가 없는 것이다. 딴은 공정하기 위해 예심이나 본심, 1차·2차로 나누어진 심사는 더욱 불공정할 수 있다. 본심에서 최고였을 작품이 예심이나 1차에서 탈락하는 일이 왕왕 있다. 대중에게 최고였을 경우가 심사위원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다.

비교적 객관·공정하다는 문학판 심사에서도 그럴진대, 지연에 학연에 사제연에 사적인연에 권력에 빽에 로비에 알아서 기는 경우에 작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받는 각계 각 분야 허다한 각종 심사 결과를 대중이 신뢰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자기(네) 돈 쓰겠다는 데는 그래도 좀 공정하게 주면 안 될까요, 바랄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국민세금 들어가는 데는, 세금 들어가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해야 한다. 보다 공정한 심사제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겠지만, 어떻게 해도 제도상 불가능하다면, 결국 심사자 개인의 상식과 양심에 달린 것일까? 역지사지라고, 심사 받는 마음으로 심사를 봐야 할 테다.

3·1 만세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서 상당한 돈이 문화예술계에 투여될 모양이다. 아무려나 보다 공정한 심사가 이뤄져, 대중이 문화예술에 국민혈세가 쓰이는 것이 옳은 일이며 옳게 쓰였다고 수긍할 만하게 행사가 이뤄지고 수작이 탄생하기를.

김종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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