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3.1운동 발자취

3.1운동 100주년 기념 회덕역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28일 대전시 대덕구 회덕역 일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회덕역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주민들이 회덕역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운동이다. 사진=빈운용 기자
3.1운동 100주년 기념 회덕역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28일 대전시 대덕구 회덕역 일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회덕역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주민들이 회덕역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운동이다. 사진=빈운용 기자
1919년 3·1 만세운동의 함성은 대전에서도 울려 퍼졌다.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남녀노소 온 민중이 독립을 부르짖었다. 대전 3·1운동은 항일 정신을 계승한 인사들과 일제의 경제적 침탈 과정에 고통을 받던 상인들이 주도했다. 다수의 농민들도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이다.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20-30대 젊은 청년층이 중심이 돼 일제의 강력한 제지에도 과감히 맞서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인동 3·1운동= 대전의 3·1운동은 인동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작됐다고 기록돼있다. 당시 인동시장은 대전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 시장으로 한국인의 전통적 산물을 주로 거래한 장소였다. 인동시장은 대전의 대표적인 3·1운동 만세시위지로 3월 3일부터 4월 초까지 4회에 걸쳐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처음은 1919년 3월 3일 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쳤다. 3월 16일 양사길·장운심·권학도 등의 주도 하에 만세시위가 전개돼 원동 일대까지 확산됐다. 3월 27일에도 다수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4월 1일은 김직원·박종병 등이 주도해 400여 명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는 등 시위를 전개했다.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출동한 일제 병력에 의해 저지되고 무력 진압에 살상을 당했다. 김직원과 박종병은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성 3·1운동= 유성에서는 1919년 3월 16·31일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16일 이권수·이상수 등의 주도하에 이정석 등 200여 명 군중들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3월 31일에는 2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 경찰의 발포에 투석으로 대항했다. 낫과 가래를 무기 삼아 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일제의 총과 칼에 무기력하게 진압된 것이다. 유성장터 3·1운동 만세시위는 일제 헌병과 수비대 보병들의 무력적 탄압으로 사상사가 여러 명 발생했고 많은 인사들이 체포됐다. 시위를 이끌었던 이권수·이상수는 징역 1년 2월의 옥고를 겪었다.

◇기타 3·1운동= 1919년 3월 12일에는 천도교가 주동이 돼 남부교회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열렸다. 25일에는 대전군 동면 세천리에서 군중들이 밤 10시까지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고, 28일에는 유천동에서 30여 명의 군중이 유천면사무소 앞에서 운동을 펼쳤다. 29일에는 기성면 가수원리(현 가수원동)에서 400여 명의 군중이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4월 1일에는 유성 3·1운동이 주변으로 확산돼 치마(현 갈마동)에서 3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회덕면에선 각 부락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회덕역에 집결해 만세를 부르다 헌병들에 의해 저지를 받았다. 산내 낭월리에서는 면민 4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대전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항쟁했다. 대전지역 3·1운동은 3월 3일부터 시작해 4월 3일까지 대전 인동·유성·유천·갈마·회덕·산내·가수원·세천 등지에서 총 19회에 걸쳐 3000여 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잔인한 일제 탄압= 일제는 3·1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3·1운동 초기 일제 정부는 별도의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고 조선 총독에게 그 진압을 일임했다. 대전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일제는 대전의 치안기관인 헌병과 보병 및 경찰을 이용해 처음부터 무력적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특히 보병 80연대 3대대는 독립만세를 외치는 비무장의 군중들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진압을 했다. 대전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최소 30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고, 40여 명 이상이 체포를 당했다. 이호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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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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